김선미 Rove 편집장
김선미 Rove 편집장

어디까지가 인간관계일까.

짧은 미팅으로 명함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나 그 회사에 아는 사람 있어’라고 말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지나도 ‘그저 일 때문에 아는 정도’라고 설명하는 부류가 있다. 나는 어떻게 해왔을까. 확실한 건, 전자의 떠벌이 스타일은 별로 신뢰하지 못하는 쪽이라는 거다.

나는 인맥의 화려함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가 단 둘인 사람도 좋고,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람들과 모임을 가지는 사람도 좋다. 다만 휴대폰에 저장된 사람이 수천 명이라고 과시하는 사람이나, 그걸 기준으로 황금 인맥 어쩌고 수식어를 붙여주는 사회 분위기는 싫다.

예전에 연예 프로에서 어떤 연예인의 휴대폰 연락처의 숫자를 클로즈업하며 “우와!! 이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똑 같은 말을 높이만 바꿔 계속 반복해 강조한 적이 있었는데, 리포터도 웃겼지만 ‘아이 뭐얼, 이 정도 가지고’의 태도로 자랑스러워하던 연예인의 표정이 정말 웃겼다. 그 숫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열거하는 건 더 대단했지만, 지면이 아까워 옮기지 않겠다. 그가 그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사는지 의문이다.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해 저장해두는 것’을 인맥이라 정의하는 거라면 그가 맞고 내가 틀렸겠지만.

아직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미움 받을 용기>는 인간관계가 우리 삶의 거의 전부라고 말한다. 인정을 타인에게 받고 칭찬도 욕도 타인에게 얻기 때문에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도를 좌우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마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더욱 그럴 것이다. 여자는 매우 감성적인 존재라, 엄마와도 툭하면 틀어졌다 울며 화해하고 언니나 여동생과도 분기별로 같은 말다툼을 반복한다. 친구도 마찬가지, 어제까지 매일 통화하던 절친과도 한두 마디로 삐걱대면 다시 보니 마니 한다. 유치한 감이 있지만, 여자들은 관계중심적이라 그렇다(고 해두자). 그 덕에 알콩달콩 가정이 오손도손 꾸려지는 거니 너무 쫀쫀하게 보지 말길.

하지만 요즘은 가치관이 좀 달라져서 누군가와 예전만큼 투닥이지 않는다. 웬만한 건 넘어가고 웬만하지 않아도 넘어간다. 대신 멀리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말을 해대는 사람을 이해할 시간에,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건설적이고 좀 더 건강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인간관계는 명백하게 양보다 질이다. 좋은 책 한 권을 열 번 읽는 게, 시시한 책 열 권을 빠르게 읽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이러쿵저러쿵 남의 인생에, 애정이랍시고 너무 자주 충고하는 것도 별로고 고민상담이랍시고 너무 깊게 관여하는 것도 길어지면 서로 피곤한 일이다. 결국 그냥 각자의 틀 안에 자기 멋대로 잘 살면서 서로의 행복과 안위를 빌어주는 것이, 슬플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 함께 웃어주는 것이,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지 않고 타인의 행운에 좌절하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 제1 법칙쯤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남이야 어쩌든 말든 나만 잘 살겠다는 건 아니다. 앞서 말한 <미움받을 용기>에서 기시미 이치로 선생은 인생의 행복을 높이는 방법은 타인에게 봉사하는 타자공헌이라고 여러 번 언급한다. 처음 읽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최근 나눔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한결같은 행복감을 목격하다 보니 타자공헌 없이 지속적인 행복감은 성립하기 어려운 공식 같다. 나 살기도 바쁘다며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다 보면 속이 알찬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소리 없이 쌓인 허탈함에 잠식당하고 만다.

20대의 무수한 밤들이 지나갔다. 그 밤들은 신났지만, 적잖이 소모적이었다. 이제는 편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며, 이 지난한 혼돈의 시국을 지나보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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