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영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교수
허균영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 교수

어디가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이다. 큰 담론 속에서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의 역할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도 오래전에 인공지능의 발전소 적용을 주제로 공부를 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당시와 교차가 되면서 뭐랄까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그런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

필자는 인공지능 자체를 연구했다기 보다는 응용적인 측면을 다뤘기 때문에, 기술에 대한 전문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아는 척을 좀 하려 한다.

필자의 관점에서 현재의 인공지능이 이전의 인공지능과 다른 점은 아마도 특징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전의 방식이 고양이 사진을 주고 고양이라 학습시키고 개 사진을 주고 개라고 학습을 시킨 것이라면, 최근의 방식은 고양이와 개 사진을 제시하고 먼저 이들을 구분 짓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찾은 다음에 비로소 고양이와 개를 연결시키도록 학습을 독려하는 것이다.

별 차이 아닌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전매특허였던 특징을 ‘이해하는 과정’까지 인공지능의 범주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1과1이 있을 때 2라고 기계적(?)으로 답하는 것과, 더하기를 이해하고 1과1을 2라고 인간적(?)으로 답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자명하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특징을 찾는 과정에서 잡음이 많이 들어간, 한마디로 지저분한 자료 속에서 특징을 찾도록 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특징’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깨끗한 사진에서 고양이와 개를 구별하는 것보다 흐릿한 사진에서 고양이와 개를 구별하는 것은 당연히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은 흐릿한 정보 속에서도 두 가지를 구분하는 확실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음이 전제돼야 한다.

이제까지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공급 중심의 전원 정책이 전개되면서, 전기가 부족하면 발전소 추가라는, 물론 어려운 결론이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훨씬 고민의 정도가 약했을 기계적 의사 결정의 과정이 별 문제없이 작동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전력 수요의 정체를 고민하면서 한정된 국내 전력 시장을 어떤 전원이 차지하느냐의 문제로 프레임이 바뀜에 따라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해졌다. 혹자는 그러한 특징을 선과 악, 보수와 진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구분하곤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것은 모두 실체를 둘러싼 겉치레일 뿐이다. 정작 기저에 깔린 불변의 과학기술적 특징은 자명하고 또렷함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경우가 많다.

기술이 같더라도 사람이 바뀌면 갈등 구조의 대부분은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술이 바뀌어 봤자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논란은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특정 발전원을 채택한다고 좋은 나라가 되지 않는다. 좋은 나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인공지능이 이제 막 특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심지어는 기계도 특징을 이해하려고 하는 판국인데 사람이 기계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

에너지 업계에 영향력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소용돌이치는 잡음 속에서 과학기술적 특징을 이해하고 여기서 비롯된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분석과 치열한 논의의 끝에는 분명 각 발전원의 역할을 구별 짓는 확고한 특징이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상황이 워낙 다양해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발전원별 특징을 제대로 걸러낼 수 있고, 이에 기반한 정책이 펼쳐진다면 정말로 장기간 견고하고 환영받을 것이다.

다른 기고를 인용하면 인공지능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위협적이지 않으며, 솔직하게 상호작용을 한다.

기계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람답게 살 수 밖에 없는지... 어쨌든 미래는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현재보다는 행복해 지는 것이 올바른 방향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