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신문 나지운 기자] 어떠한 사건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쓸 때는 양측의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한다.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쓴다면 자칫 편향된 기사가 돼 공정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취재원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기자에게 공개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도 마치 전체를 다 안다는 양 기사를 쓰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변론이라도 들어 보면서 기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알아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변론을 듣는 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변론을 듣지 않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철도 전기공사 시공 업체들이 관련 노조의 파업 및 불법 행위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복수의 취재원들에게 사실 여부를 크로스체크하고 관련 서류까지 입수한 만큼 사실 여부는 확실했다. 그럼에도 노조측 얘기를 들어볼 필요는 있었다. 어찌 됐든 기사의 당사자인데다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말해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건설 분야 노조에 전화번호가 흘러 들어갔다가 된통 고생했다는 전 직장 선배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로 험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결국 노조측 입장은 들어보지 않은 체 기사가 보도됐다. 보도된 지 제법 지나서 회사로 전화가 왔다. 나지운 기자가 누구냐는 전화였다. 자신을 건설노조 모 지부 사무국장이라고 소개한 그는 꽤나 무례한 이야기를 연신 내뱉으며 나를 질타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중동도 아닌 매체라서 무시하고 넘어가려다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는 멘트였다. 어디서 보고 베꼈는지 그럴듯하게 쓰긴 했지만 착각이라는 충고도 해줬다. 정정보도를 내달라는 말에 오보가 아니면 그럴 순 없다고 하니 결국 한통속 아니냐는 지적도 해줬다.

그와 제법 오래 얘기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사는 사실만을 다뤘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노조들과의 협상으로 곤란해하는 기업의 입장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타협은 자신과 상대방이 모두 한 발짝 양보할 때 가능해진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순간 타협이라고 하긴 어렵다. 변론도 들어봐야 한다는 기자의 원칙이 잠시나마 흔들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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