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는 시나이 반도 동쪽부터 레바논과 시리아까지 이어지는 대서양 동쪽 해안의 도시국가 연합체로 기원전 15세기에서 10세기에 번성했는데, 오늘날 가나안으로 일컫는 지역이 바로 페니키아다. 이집트가 강으로 도시들을 연결해 나일 제국이 되었다면, 페니키아는 바다로 연결된 도시들이 해양제국을 이뤘다.

고대 페니키아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이집트가 있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15세기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기를 끝내고 다시 제국의 면모를 회복한다. 이른바 신왕국 시대다. 이민족의 침입은 신왕국으로 하여금 피라미드 대신 군사력에 투자하게 만들었다. 파라오부터 지배층 모두가 선군정책을 펼쳐 5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상비군 체제를 구축하고 세티1세, 람세스 2세 등 정복 파라오들이 이끌었다. 동시에 이민족으로부터의 위협을 막는 방어선을 시나이 반도에서 동진시켜 멀리 아무르(오늘날 시리아-레바논 지역), 카데시까지 펼쳤다. 본토에서 무려 1000km 떨어진 지역에 제국의 방어선을 둔 것인데, 이것이 페니키아의 기회가 되었다.

페니키아는 이집트의 제국 방어선 확장에 필수적인 군수조달을 지원하며 이른바 고대 이집트-페니키아 동맹 체제의 한 축이 된다. 동시에 선진문명 특히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기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갤리선이다. 갤리선은 이집트의 로프 트러스 돛배를 기반으로 2층 노를 달아 추진동력을 강화한 선박인데, 바람과 무관하게 선회하고 부딪쳐 격파할 수 있어 바다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든 혁신이었다. 대항해 시대에 흑선이 있었다면 고대 지중해엔 페니키아의 갤리선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부터 10세기 간 이집트 신왕국이 추진했던 제국 확장 정책은 페니키아의 해상지원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웠으니, 페니키아의 전성기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와 겹치는 것이 이런 이유다.

이후 페니키아는 지중해 남쪽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의 해상무역을 지배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멀리 이베리아 반도까지다. 페니키아의 항로만이 안전하고 확실한 거래를 보장했다. 그리고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고 운영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카르타고(페니키아에서 박해받던 공주가 세운 신세계다.), 크레타(제우스가 데려간 유로파가 페니키아의 공주다. 미노스로 유명한 문명을 세운다.), 테베(유로파를 찾아나선 오빠가 그리스의 야만부족을 거느려 세운 왕국이다.) 등이 있다. 또한, 알파벳 문자를 만들어 그리스에 전파했다. 해상무역에 필수적인 문자체계였으니, 에게해의 섬에 근거했던 그리스인들에게 아주 유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페니키아는 생소하다. 말하는 이도, 배운 바도 적기 때문이다. 이는 18세기 이후 민족주의적 편향에 사로잡혔던 유럽 사학자들은 역사의 족보에서 페니키아를 지웠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유럽 문명을 구성하는 3 가지 기둥, 해적성(갤리선), 식민지 무역, 알파벳 모두 페니키아가 물려준 것이다. 관련 내용도 모두 그리스 신화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리스인들도 페니키아가 외가임을 인정했음이다. 그런데 페니키아가 바알신을 숭배한 셈족계열이기 때문으로 소위 기독교 독트린에 물들었던 18세기 유럽 인종주의 사학은 페니키아를 투명 역사 취급을 한다. 할머니를 족보에서 지운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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