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리스크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사람들은 진작에 다 잘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 방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라구람 G. 라잔이 2008년 리먼 브라더스발 금융위기를 앞둔 2007년 봄의 어느 회의에서 베테랑 리스크 매니저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학자들은 대형은행의 리스크 매니저들이 주택시장 붕괴 가능성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질문을 던졌지만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고, 쉬는 시간에 위와 같은 말만 들었다고 한다. 금융회사의 왜곡된 거버넌스가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 라잔의 저서 ‘폴트라인’에 서술된 에피소드이다.

비단 금융회사들의 투자결정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제행위를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이 나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루어지는 것인 이상, 리스크는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중요하게 관리되어야 할 문제다. 이는 전력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간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시스템 리스크는 정부 주도의 전력수급기본계획, 전력시장 보상구조와 전력거래소의 전력계통운영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되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전력산업의 가장 큰 리스크인 블랙아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시 적정예비율을 고려한 전원별 발전설비 비율을 적용해 왔다. 그리고 전력시장운영규칙은 CBP 체제 하에서 희소가격(scarcity price) 미형성으로 인해 SMP를 통한 투자비 회수기회가 제한적인 점을 고려해 적정예비율 유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발전설비에 대해 용량요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전력거래소는 계통제약 등의 상황에서 개별 발전기에 대한 급전지시를 변경하고 조절할 권한을 별다른 제약 없이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전력산업의 상황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전력산업의 시스템 리스크는 차츰 증가하고 있다. 그 핵심 원인은 에너지전환이다. 급전지시에 의한 발전량 통제가 불가능한 간헐성 전원인 재생에너지의 급속한 확산이 머지않아 전력거래소의 전력계통운영을 한계상황으로 내몰 것임은 왠만한 전문가라면 잘 알고 있다. 배터리는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수익성 좋은 전기자동차에 우선 공급될 것으로 보이기에, 한동안은 ESS가 전력계통운영에서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송배전망 구축 역시 경제성과 지역수용성 문제로 요원한 상황이다. 건설물량과 완공시점을 예측하기 어려운 재생에너지의 전력믹스 내 비중 확대로 인해 전력수급기본계획은 계획(planning)에서 예측(forecasting) 혹은 희망사항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적정예비율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중대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하나 둘 퇴출하게 될 석탄발전의 간극을 메꾸고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에 대처할 것으로 기대되는 유연성 자원인 LNG 발전소 건설의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최근 국민들의 높아진 환경의식으로 인해 LNG 발전소마저 지역수용성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2050 탄소중립 시대가 되면 필연적으로 좌초자산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LNG 발전소에 대한 투자 기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 전력시장 보상체계 하에서는 짧아진 가동연한 내에 신규 발전소 투자비용을 회수할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이 가시화돼 에너지전환의 이행기에 LNG 발전소가 가교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에너지전환 그 자체가 좌초될 수도 있다.

과거 예대금리규제 등을 통해 상당히 안정적으로 관리돼 왔던 금융산업이 금융자유화와 파생금융상품의 물결 속에서 시스템 리스크가 높은 산업으로 탈바꿈하였듯 지금까지 정부규제 하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돼 왔던 전력산업 역시 에너지전환의 과정 속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시스템 리스크에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리스크는 개별 전력기업 차원에서 관리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와 계통운영자인 전력거래소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전원설비, 전력수급과 전력계통의 전방위적 불안정성을 예상, 분석하고 대응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거버넌스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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