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 보자. 우리 가정 내 TV,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각종 가전기기들과 전기차들이 모두 사물인터넷(IoT) 기능을 탑재하고 우리 가족들의 스마트폰과 연동되어 있다. 전력회사는 그로부터 생성된 정보를 바탕으로 딥러닝을 통해 각 가정의 전기소비 스케줄과 패턴, 그리고 전기수요를 예측할 수 있다. 공장의 기계장비들 역시 인공지능(AI)이 결정하는 생산량에 기반하여 전기소비 스케줄과 소비량을 계산하여 전력회사에 보내게 된다.

전력회사는 이와 같이 취합된 전기수요예측에 근거하여 그리고 자체 발전기의 가동패턴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고려하여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소화하는 최적의 전력생산방식을 인공지능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 이때, 전력회사는 역시 인공지능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대대적으로 향상된 고해상도 기상예보에 근거하여 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을 예측하고 이어서 변동성 대응 전원의 발전량을 결정할 것이다. 이후 기상과 전력계통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발전기별 발전량을 조정하면서 고객 전력수요에 부족한 전력은 미리 계약된 발전사로부터 또는 전력시장을 통해 구매한다. 그리고, 전력회사는 고성능 컴퓨터의 계산결과를 바탕으로 고객 가정과 공장에 불편이나 영향을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전기소비가 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기소비 스케줄과 패턴을 직접 미세 조종한다. 냉장고의 가동을 잠깐 중지하거나 전기차의 충전시점을 앞당기거나 미룬다. 물론 전기가격이 급등할 경우 전기차로부터 방전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력산업 4.0에 대한 필자의 상상은 이미 현실화되었거나 현재 개발되고 있는 기술을 참조하여 단순히 나열한 것일 뿐이기에 새로운 것은 없다. 오히려, 전력산업계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상상의 내용이 미래 전력산업의 구조에 주는 함의에 있다.

머지않아 이러한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전력산업 4.0의 진정한 승리자는 플랫폼 사업자가 될 것이다. 고객과의 접점에 위치하면서 전기 소비 및 생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전 및 실시간의 대규모 고해상도 데이터를 취합하여 초고속으로 처리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력산업을 한참 앞서가고 있는 ICT산업에서의 경험을 통해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바이다. 전력산업 4.0 시대에 중요한 부가가치는 일방적인 전기공급이 아니라 (유튜브가 이용자의 기호를 파악하여 맞춤식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처럼) 고객정보에 연계하여 실시간으로 전기의 소비와 공급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창출될 것이다. 미래 금융 패권전쟁이라 불리는 마이데이터 사업 각축전에 네이버, 카카오 등 다수의 핀테크 기업이 출사표를 내자 기존 금융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 또한 전력산업계가 무심코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전력산업 4.0 시대의 사업자들은 지금의 스마트폰 기반 플랫폼산업에서 볼 수 있듯이 플랫폼과 함께 전기판매기능과 발전기능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직접 관장하는 애플형 사업자와 플랫폼만 보유하면서 전기판매회사와 발전회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글형 사업자로 양분될 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경우든 새로운 플랫폼 사업자의 수요예측능력과 생산조절능력을 능가할 수 없다면, (하드웨어는 21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나 구동 프로그램은 20세기 초에 개발된) 구식 플랫폼을 보유한 전력거래소가 현재 누리고 있는 제왕적 권능은 홀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전기가 공공재인지, 전력산업은 재통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한전의 재생에너지 투자를 허용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급변하는 전력산업 환경을 애써 도외시하는 한담(閑談)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전기공급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한전이 전통적인 전기공급사업체제를 고수한 채 전력산업의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길을 터주지 않거나 플랫폼 사업자로 전격 변신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눈 앞에 닥친 전력산업 4.0 흑선의 위협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게 되고 말 것이다.

프로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해외자원개발협회 연구위원 ▲국민연금공단 대체투자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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