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5일.

기원전 15세기 전의 그리스는 궁벽했음에 틀림없다. 하긴 땅의 크기가 겨우 한반도의 절반 정도로, 그나마 산지가 절반인데 구릉까지 더하면 8할에 이른다. 이런 처지에 농사로 부를 쌓아 문명을 흥청거리기란 원래 가당치 않았을 것이고, 고작 부족정도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족했을 것이다. 구릉이 많았으니, 양을 치거나 올리브를 기르면 멀리 잘사는 이집트나 페니키아에서 온 명품을 누릴 수는 있었을지라도 작금에 흔히 망상하는 그런 찬란한 그리스라든지, 제국으로서의 그리스란 땅만을 놓고 본다면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스 전성기도 따져보면 고작 100여년(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450BCE부터 마케도니아에게 무너진 356BCE까지)이니, 한자락에 불과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리스는 궁벽에 더해 근본도 없다. 건국신화가 없는 것이다. 제우스니 하는 신들의 이야기는 원래 근본에 상관없이 다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들일 뿐, 나라나 집단의 정체성을 어찌 세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제우스가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가 아니고 우주거나 세상이니까. 해서 그리스에는 우리의 주몽이나 비류, 온조와 같은 이야기가 없어 보인다는 것인데, 이제 처음 말하자면 카드모스가 그것이다.

카드모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특이하게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인 티로스의 왕자였다. 남매지간으로 포이닉스, 킬릭스, 에우로페가 있었고, 부왕은 아게르노, 어머니는 텔레파사다. 아게노르는 영민하고 예뻤던 딸 에우로페를 엄청 아꼈는데, 이 에우로파가 황소로 변한 제우스(그리스 해적)에게 납치되어 크레타 섬으로 끌려가는 사건이 생긴다.

부왕 아게르노는 오빠들에게 크게 화를 냈다. 카드모스와 어미가 작당하여 여동생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래서 명을 내린다. 동생을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카드모스는 어미와 함께 길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찾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크레타로 가지 못하고 육지를 통해 그리스 반도 북쪽을 통과해 남하해서 테베까지 내려가게 되는데, 농사짓고 소를 키울만해 보였다. 소서노와 함께 한강 위례에 이른 비류와 온조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테베에 정착한 카드모스는 아테나 여신의 지시에 따라 용을 죽이고 이빨을 뽑아 땅에 뿌린다. 그러자 땅에 떨어진 용의 이빨에서 토착 전사들이 솟아오르는데, 이들을 모두 죽여 다섯 명만 남게 한 후 함께 테베를 세우니, 이것이 그리스의 시작이다.

결국 카드모스가 그리스를 세운 최초의 왕이다. 신화는 페니키아의 세력 일부가 변방 그리스에 들어와 토착 부족을 정복하며 자극해 선진 기술과 문명을 전파하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다섯 부족과 연합하여 도시국가 테베를 건국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테베로부터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해 우리가 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파생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사는 일은 이제나 저제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쪽 끝 한반도에서 살던 자들이 부여로부터 백제에 이르며 문명을 전파하고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나 서쪽 끝 발칸반도에서 문명을 전파하고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가 다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이 자연스러운 역사가 보인다면 궁벽한 땅에서 일어나는 그리스 신화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원래 페니키아 여자들은 능력이 출중했다. 에우로파는 납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결국 크레타 전체를 지배하는 왕으로 세웠다. 그러니 오빠들과 어미가 경계했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는 페니키아의 공주 엘리사가 남동생과 싸움 끝에 북아프리카로 뛰쳐나간다. 그곳에 제국을 세우니 바로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다퉜던 카르타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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