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력산업의 거의 모든 이슈는 사회적 논쟁으로 확산되어 전개된다. 또 종착역은 탈원전의 영향이냐 아니냐로 압축된다. 향후에도 당분간 이러한 공방의 틀이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안정적으로 전력이 공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전력산업에서 왜 이렇게 논쟁의 끝이 없는 것일까?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원인을 한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몇몇 원인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우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중앙집권적인 전력산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 정도까지 전력수요는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전력수요 성장이 경제성장률을 훨씬 상회했다. 특히 같은 기간 산업용과 일반용의 전력수요 성장은 압도적이었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전력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역량은 공급의 확대에 집중됐다. 특히 규모의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원자력 및 석탄과 같은 대규모 발전, 이로부터 생산된 전력을 원격 수요지에 대규모로 수송할 수 있는 765kV 등의 송전망의 적시 구축이 가장 큰 정책 목표였다. 중앙집권적인 구조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간주된 것은 당연하다. 계획에서부터 요금 수준까지 모두 중앙 정부와 공기업이 결정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집권 구조는 표면적으로 매우 안정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갈등 요인들이 계속 축적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전력산업의 거의 대부분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비자는 철저하게 배제됐다. 생산자와 원료원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애당초 없었고 수천만의 소비자는 획일화된 연료 구성비를 가진 하나의 전력회사가 일률적으로 공급할 뿐이다. 또한 요금의 관점에서 전국의 수천만 소비자는 소수의 몇 가지 종별로 대표되고 있다. 개개 소비자들의 특성이 반영된 수요관리보다는 몇 가지 대표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해 시행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즉 개별 소비패턴을 최적화하는 소비자 중심 기술보다는 대표적인 하드웨어 기술을 적절하게 보급하는 전형을 가지고 있다. 지역별 요금의 차이는 물론 없다. 전기소비자가 소비 가치에 대한 의사를 표명할 방법도 분산형 설비를 설치한 생산자로서의 역할도 매우 제한적일 뿐이다. 최근 주택용 누진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만이 넘는 각 주택용 소비자의 이해를 하나의 요금제도로 녹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 최근 판매 개방이 이루어진 일본에서는 500여개 회사가 소비자의 취향과 가치를 반영하는 요금 제도를 제각기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 향후 지속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는 2001년 발전부문의 경쟁을 도입했지만 이는 당시의 전력산업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미 20여 년이 지난 현 시점의 시대적 요구와는 괴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대규모 발전, 송전, 소비의 전력시스템은 신재생 소규모 생산과 마이크로 그리드 등을 바탕으로 하는 분산형으로 변화돼야 한다. 이는 갈등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전력산업이 중앙집중형에서 분권형으로 진화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분산형 시스템은 신뢰도와 계통 복원력의 관점에서도 상당 편익을 제공할 것이다. 계통 운용도 현재의 송전망 중심에서 배전망 운용을 적극 포함해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지역 배전망에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분산형 전원이 연계되고 이의 실시간 감시와 제어는 미래 계통운용의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소비자에게 공급자·연료원의 선택권도 점진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믹스의 결정은 소비자의 선택을 바탕으로 결정돼야 하며 RE100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돼야 한다. 특히 소비자들이 신재생원을 선택할 경우 별도의 선택권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이는 신규 신재생판매사업자 혹은 중개사업자의 도입과 활성화를 전제하고 있다. 한전이 도입 예정인 녹색요금제와 신규 신재생판매사업의 도입은 병행할 필요가 있다. 주택용 소비자가 녹색요금제나 신재생사업자를 통하여 전력을 공급받을 경우 자연히 누진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캘리포니아에서는 계시별 요금제를 도입하여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누진제를 벗어나도록 제도를 설계한 바 있다.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보장하여, 장기적으로 에너지 믹스도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다.

전력산업은 공급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이니 이의 보장을 전제로 하는 점진적인 전력산업의 진화를 모색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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