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진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교수
안서진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교수

지난 9월 사단법인 한국독립PD협회에 계약서 관련 민원이 들어왔다. 방송발전기금의 제작지원을 받은 지역의 모방송사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프리랜서 박 모 PD는 사전 계약서 작성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그리고 사업 종료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방송사가 아닌 담당 PD와의 계약서 초안에 대해서도 수정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한 상황이었다. 계약서 없이 진행된 제작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진행비를 요구하자 선지급된 연출료에서 일단 쓰도록 했는데 만약 계약서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사항이다. 결국 제작은 마무리됐고 서명되지 않은 계약서를 포함한 관련 서류는 제작지원기관에 제출됐으나 아무 문제 없이 완료됐다.

진행비 정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사전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은 근로기준법, 하도급법, 예술인복지법 위반에 해당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방송사 담당 PD의 인식이었다. “서면 계약이 늦어진 거지 OOO만 원 주기로 합의했다. 그럼 계약서 없이 왜 PD는 일을 했냐?”라는 식의 말이 실로 개탄스러웠다. 사전계약과 구두계약에 대한 인식. 이 또한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 1991년 방송의 다양성과 프로그램 경쟁력 측면에서 외주제작이 도입됐지만 꽤나 오랫동안 계약서 없이 구두 계약이나 이마저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을 진행했었다. “이번에 OO프로그램 같이하자” “내가 얼마 줄게 같이 할래?” 등 아는 선배나 동료의 권유로 제작 일선에 뛰어드는 게 다반사였다. 필자도 오랫동안 외주제작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했었지만 계약서를 썼던 기억은 손에 꼽는다. 다행히도 급여를 못 받는 일은 없었지만 언제 잘릴지 모를 고용불안은 늘 가지고 있었다. 실제 고용보장 기간이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갑자기 폐지되거나 관리자와 갈등이 있다면 실업자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워낙 시장이 좁기 때문에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입 닫고 조용히 지내야 했다.

2021년 현재 방송 외주제작 시장에는 여전히 관행으로 치부되는 불공정 사례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문제가 계약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9년 외주제작스태프들의 서면계약 경험률이 평균 54.7%로 나타났다. 교양프로그램은 45%, 예능프로그램은 54.3%, 드라마가 81.7%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직종별로 작가는 43.6%, 연출은 51.4%, 기술은 68.6%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희망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소속 드라마 스태프 333명을 대상으로 지난 9월 조사를 했는데 근로계약서를 체결한 경우는 전체의 1/5 수준인 21.3%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방송사 또는 외주제작사의 관행, 요구 때문”이라는 대답이 77.5%였다. 20년이 된 외주제작 시장에서 여전히 서면계약이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앞서 말한 관행뿐만 아니라, 서면계약서의 효력에 대한 회의, 즉, 보수지급이나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는 2014년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방송사나 제작사, 스태프들에게 이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표준계약서 인지도뿐만 아니라 표준계약서 이용률도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표준계약서 인지도는 72.2%, 표준계약서 경험률은 38.6%로 집계됐다(2019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근로계약서 체결이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지만 아직 미진하다. 거대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가 제작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계약서를 체결하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지만, 그들은 권리와 이익을 포기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럼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현행 방송사 승인과 허가 시 계약서 체결에 따른 벌점과 벌금을 더욱 상향 조정해야 하고 미체결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땐 인허가를 취소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또한, 제작사에게도 벌금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폐업까지 가능하도록 관계 법령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필자는 방송 외주제작 시장에서 불공정 관행으로 여전히 뿌리 깊게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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