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탁(한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조영탁(한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한때 이성과 과학이 종교와 신학의 시녀에 불과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 중세 철학을 붕괴시키고 종교적 신념이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 문제에 접근한 것이 바로 계몽주의 시대이자 근대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정치적 억압과 파시즘, 경제적 빈부격차,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와 인간 소외 등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가 발생하고 급기야 ‘이성의 해체’와 같이 반이성주의가 거세게 몰아쳤다.

그 거친 파도 속에서 합리성 개념의 재정립으로 이성을 위기에서 구출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 석학이자 철학자인 하버마스(J. Habermas)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정립한 두 가지 개념이 바로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의 합리성’이다. 전자가 주관적 신념이나 막연한 근거가 아닌 과학적 분석과 합리적 근거로 문제해결에 접근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대화와 소통으로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면서 문제해결에 접근하는 것으로 하버마스 철학의 핵심에 해당한다. 즉 전자의 합리성을 갖추더라도 분석과 근거가 달라 이견과 대립이 발생할 수 있지만, 인간에겐 대화와 소통으로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진영에서 강조하는 ‘참여’와 ‘공론화’ 그리고 ‘숙의민주주의’가 바로 ‘의사소통의 합리성’과 맞닿아 있다.

최근 진보 진영이 주도하고 공론화까지 거친 온실가스 감축목표 40% 상향안을 놓고 우려의 소리가 높다. 과연 이번 상향안은 자신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두 가지 합리성’을 어떻게 다루었을까? 우선 송구한 얘기지만 오랜 기간 에너지계획과 정책에 직간접으로 관여해 온 필자의 경험상 2050년 탄소중립은 물론 2030년 감축목표 상향이 ‘과학적 분석과 합리적 근거’를 통해 마련된 것 같지는 않다. 30년 감축방안에 등장하는 신기술이 언제 생산현장에 적용 가능한지, 탈원전과 석탄화력의 급감속에서 이를 대신할 재생에너지 30%가 2030년까지 가능한지, 그 비중하에서 계통신뢰도 유지와 계통운영 그리고 비상시 수급안정이 가능한지, 이에 따른 백업설비와 저장설비 비용 그리고 전력망의 재구축 비용은 얼마나 들고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무엇보다 전력요금의 공공적 통제와 과감한 감축상향이란 자기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분석과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어떤가? 의견 수렴 이전에 사실상 정해진 목표수치에 코로나 상황에 급조된 공론화를 숙의민주주의나 ‘진정한 의사소통’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감축목표의 비현실성을 언급하면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한 거부’, ‘감축 거부를 위한 핑계 찾기’, ‘국제적 책무의 망각’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사소통일까? 그것도 감축목표 상향에 필요한 과학적 분석과 합리적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오해 방지를 위해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자. 다수의 전문가와 여론은 ‘어렵지만 가야 하는 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기에 어려운 길’에 반대하는 것이다. ‘감축 거부의 핑계 찾기’가 아니라 ‘건설적 비판을 핑계 찾기로 치부하는 소통 거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국제적 의무의 책임 회피’가 아니라 ‘비현실적 목표로 국민부담과 국가신뢰를 저버리는 무책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의 에너지정치가 진영논리에 치우쳐 원전 올인과 탈원전이란 좌우의 극단을 오간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의 감축방안은 좌우방향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의 시대 이전으로 후퇴한 듯하다.

‘탄소중립을 위해 30년 감축목표를 믿고 따르라’는 정책철학과 ‘알기 위해서 믿고 따르라’는 중세 교부철학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설령 그 정책 철학이 지구생태계와 미래세대를 위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철학이 주관적 신념과 막연한 희망의 시녀가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는 시장과 경제현실을 무시한 채 선한 의도로 포장된 정책의 부작용을 여러 차례 피부로 경험한 바 있다. 아마 2030년 감축목표 상향 역시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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