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바이벌 패밀리(2017)’는 갑자기 모든 전기 공급이 중단된 도쿄의 모습을 그린다. TV에 빠진 아빠, 음악에 미친 아들,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딸. 한집에 사는 남들이나 다름없는 이 가족은 대정전 이후 일상이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자 살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는다. 그러면서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영화는 다소 뻔하지만, 묵직한 감동이 느껴진다는 평이다. 나름 해피엔딩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정전이 일어나면 어떨까. 모든 경제 활동이 멈춰서고, 일부 사람은 목숨까지 위협받을 것이다. 연명 장치 치료를 받는 환자들 등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전기는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전기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전기는 헌법이 규정하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자주 잊는다. 마치 땅에서 솟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전기를 여긴다.

국가의 바탕이 되는 산업을 기간 산업이라고 한다. 기간 산업은 법으로 발전이 강제된다. 건설, 철도, 방송 통신, 물 관리 분야 등이다. 기본법이 만들어지면 정부는 일정 기간마다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조사를 통해 정책 추진의 실효성을 검토해야 한다.

오랫동안 정치권은 기간 산업으로서 전기를 간과해왔다. 60년 넘게 전기 생산을 공기업이 독점한 탓이 크다. ‘전기=산업’ 인식이 미약하다. 그러나 전기는 발전(생산)뿐만 아니라 송배전·설비·유지 보수 등 여러 분야가 있다.

전기 산업은 △신재생 에너지 사용 확대 △이모빌리티 수요 증가에 따른 배터리 산업 활성화 △디지털화 가속 등에 힘입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전기 송배전 부문은 탄소 중립 기조에 따른 신재생 에너지 확대로 폭발적 성장이 점쳐진다. 시장 조사 기관 골든 리포트에 따르면 전 세계 송배전 시장은 2028년까지 2조 3400억 달러(약 2690조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그런데, 제도적 인프라가 부족한 국내 전기산업 기업들이 이를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기 분야 기본법은 앞서 두 차례 제정이 시도됐다. 20·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전기산업발전기본법(이하 전기기본법)이다. 20대에 이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21대에 김주영 민주당 의원이 다시 발의해 현재 소관위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전기기본법」은 다른 기본법과 내용이 비슷하다. 전기 산업의 꾸준한 성장을 위해 정부가 5년마다 발전 계획을 수립·추진하고, 실태 조사 결과를 기본 계획에 반영

하는 식으로 정책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골자다. 이외에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전기 산업 관련 전문 인력 양성 및 고용 촉진을 위한 시책을 수립·추진해야 하며, 전기의 소중함과 전기

산업인의 긍지를 고취하기 위해 매년 4월 10일을 국가 기념일(전기의 날)로 지정한다. 현재 ‘전기의 날’은 민간 기념일로 진행되고 있다.

4월 10일은 121년 전 한반도에 민간 최초의 전깃불이 밝혀진 날이다. 조선 후기 문신 정교가 쓴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따르면 이날 종로 네거리에는 3개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전차 정거장, 매표소를 비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한전기협회 등 전기 업계는 매년 4월

10일을 전기의 날로 정해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주영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에서 “4차 산업 혁명 등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따라 전기 산업 생태계 역시 빠르게 변하고 있다”며 “그러나 전기는 그 자체가 지니는 국가적, 사회적 중요성과 비교할 때 현재 법 체계상 전기 산업 발전의 근거가 되는 기본법조차 전무할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전기의 지속적, 안정적 공급뿐만 아니라, 전기 산업의 토대 마련과 육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며 “(특히) 다양하고 급격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려면 국가의 체계적 전기 산업 정책 관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기기본법 제정은 전기 생태계 구축의 초석과 같다. 또 우리나라 전기 산업 역량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산업 육성 의지를 법적으로 뒷받침하여 전기 직종 종사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산업 발전을 끌어낼 수 있다. 산업은 식물과 비슷해 관심 주는 만큼 자라나기 마련이다.

법 제정이 필요한 장기적 이유로는 ‘남북협력’도 있다. 남북은 송배전 전압이 다르고, 특히 북한은 전력 공급이 부족하여 전압과 주파수가 5%~20%까지 널뛰듯이 변동될 정도로 불안정하다. 이는 미래에 통일 시 모두 ‘통일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 기본법은 이런 문제를 미리 준비, 대처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전기는 정보 통신 기술(ICT)과의 융합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전기의 생산·운송·분배·소비 등의 전 과정에서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고, 특히 마이크로그리드(Microgrid), VPP(Virtual Power Plant) 등 새로운 개념의 ICT 접목 산업이 확장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 업계는 본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던 20대 국회와 달리 21대에는 반드시 기본법을 통과시킨다는 의지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전기 산업의 미래를 판가름할 ‘국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_김민령 한국전기산업연구원 시공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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