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적 요인 화재사고 원인 대부분이 배전반
제도 개선 노력도 국회 못 넘고 수년째 공전
안전제품 구매·민수시장가 현실화 등 방안 필요

소방청이 지난 2월 발표한 ‘건물 56만동 화재안전특별조사’ 전기분야 지적사항
소방청이 지난 2월 발표한 ‘건물 56만동 화재안전특별조사’ 전기분야 지적사항

#11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의 한 양식장 내 컨테이너에서 불이 났다. 이 불로 컨테이너 일부와 산소발생기 장치, 배전반 등이 소실됐다. 재산피해액은 소방서 추산 576만원에 달한다. 소방당국은 배전반에서 전기적 요인에 의해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17일 부산 중구의 한 건물 4층에 있는 옥외 배전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20여 분 만에 꺼졌지만 당시 배전반 차단기를 교체하던 작업자 A(60대)씨는 얼굴 등 몸에 2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배전반이 전기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상가, 주택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재가 발생하는 탓에 전문가들은 배전반 화재 방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문제의 온상인 노후 배전반의 권장사용기간을 정해 설비 안전성을 높이려는 제도적인 노력 또한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안전성을 높인 제품을 개발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발주처·사용자의 낮은 안전 인식이 ‘배전반 안전’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토로가 나온다. 배전반으로 인한 사고 우려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배경이다.

◆전기분야 불량사항 14만1587건…배·분전반 전체 2위 ‘불명예’= 소방청(청장 정문호)이 지난 2월 발표한 ‘건물 56만동 화재안전특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기분야의 불량사항은 전체의 11.2%인 14만1587건에 달한다.

이 중 중대위반사항은 7260건으로 누전차단기 미설치, 배·분전반 불량, 전기부하 정격 용량 부적정, 경미한 사항은 배전반 문짝 교체(불연화), 노후차단기 교체 등이 지적됐다.

특히 배·분전반의 위반사항이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배·분전반은 전체의 35.8%인 5만 514건의 위반사항을 지적받았다.

전체 불량사항 중 가장 많은 건수를 기타사항(48.7%, 6만 9175건)이 전열기 사용·문어발식 전선 등 다양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단일 품목으로는 배·분전반이 사실상 1위를 기록한 셈이다.

주요 위반 내용을 살펴보면 불연성 및 난연성 미비가 전체의 13.9%(1만 9558건)로 가장 많았다.

▲사용(출입)불가(9.4%, 1만 3303건) ▲배·분전반 설치위치 부적정(8.5%, 1만 2078건) ▲방수형 미비(2.6%, 3541건) ▲격벽 미설치(1.4%, 2034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와 관련 소방청은 “전기설비업자 및 간판설치·인테리어업 등 편의주의 시공으로 기준위반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며 “일반용 전기설비 지적사항이 행정명령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수시장 저가입찰·낮은 안전인식 위험 키워= 업계에서는 배전반으로 인한 사고가 줄을 잇고 있는 것과 관련해 “현재 시장 시스템을 보면 사고가 없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먼저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굳어진 민수시장의 제품 공급 시스템이 원인으로 꼽힌다. 일정 수준의 제품가격이 보장되는 관수시장과 달리 민수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가격’이다. 이 때문에 발주처의 요구가격에 맞추다보니 저가 제품을 공급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민수시장 사업비중이 높은 한 배전반업체 대표는 “기술·제품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한 중소제조기업은 울며 겨자먹기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민수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며 “가격을 맞추다보니 제품 품질에 신경 쓰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유통된 제품 상당수가 관수시장에서 요구하는 제품·기술 수준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일부 업체는 규격에 부합하는 원자재를 사용하지 않거나, 아예 최소한의 기능만 구현되는 제품을 납품하는 경우도 잦다는 전언이다.

아울러 발주처·사용자의 낮은 안전인식도 배전반 시장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업체들의 경우 상당 수준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안전성을 높인 제품을 개발했음에도 안전의식의 부재·비용 부담 우려 등으로 인해 발주처·사용자가 구매를 주저하는 사례가 잦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수억 원을 들여 제품을 개발했으나 발주처에서는 가격이 안 맞는다며 구매를 거부했다”며 “시장에 안전성 높은 제품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잇따른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짚었다.

◆늘어나는 노후 배전반, 좌절된 제도 개선= 시장에 안전성 낮은 제품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교체·유지관리 등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점도 화재 사고 급증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노후배전반이 대형화재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제품 내구연한조차 법적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지난해 2월 김삼화 전 의원이 배전반 내구연한 지정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해 관심을 모았으나 법안은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해당 개정안은 지난 5월 29일 임기만료로 폐기된 상태다.

이 법안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집합건물에 해당하는 배전반(자가용)의 권장사용기간을 정해 고시하고, 권장사용기간이 지난 배전반에 대해 정기적인 점검·교체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위한 권장사용기간은 30년으로 제시됐으나 구쳬적인 기간을 두고서는 이해당사자간 입장차가 커 결론을 내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관공서 등 관수시장 발주처에서는 20년의 내구연한을 두고 배전반을 지속 관리하고 있는 만큼 민간 부문에서도 이를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배전반 업체 대표는 “관수시장 공급 제품보다 성능·안전성이 떨어지는 제품이 무기한 방치되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입법에 속도를 내 ‘내구연한 지정’이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제품 구매 확대하고 민수시장 가격 정상화해야= 배전반 화재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법제화 노력과 함께 시장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특히 시장체질 개선의 경우에는 다수 이해당사자가 포함돼 이해관계 조정이 쉽지 않은 만큼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안전성 높인 제품의 구매 확대가 거론된다. 제품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선순환고리를 만들어야만 업계에서 안전제품 연구개발 동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안전제품을 출시한 한 업체 관계자는 “안전성이 사회적 화두라고 하는 데 배전반업계만 예외가 아닌가 싶다”며 “제품을 개발해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연구개발에 투자를 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민수시장의 가격을 정상화해 저가·저품질 제품의 양산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이 관계자는 “민수시장에서는 가격 문제 해결 없이 양질의 제품 공급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단순히 발주처에 가격을 올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소방청이 지난 2월 시행한 화재안전특별조사를 통해 지적사항 개선이 이뤄진 배·분전반 설치 개소
소방청이 지난 2월 시행한 화재안전특별조사를 통해 지적사항 개선이 이뤄진 배·분전반 설치 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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