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명작 ‘로마의 휴일’(1953년)을 탄생시킨 작가, 달톤 트럼보(Dalton Trumbo, 1905~1976)는 이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지만,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응한다는 명분아래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47년 반미활동위원회다. 위원회는 문화 예술에 대한 검열과 주홍글씨 새기기에 몰입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잘 나가는 작가였던 트럼보도 그 중 하나였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그는 여러 가명을 쓰며 원고를 넘겼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로마의 휴일과 브레이브 원(1957년)도 그랬다. 실체 없는 매카시즘의 마녀사냥에 실체 없는 가명으로 버텼다.

그가 사망한 지 35년이 지난 2011년, 미국 작가조합은 그의 모든 작품 명의를 트럼보로 고쳤다. 영화만큼이나 극적인 명예회복이자 해피엔딩. 늦었지만 아카데미 트로피도 그의 무덤 앞에 떳떳하게 놓일 수 있었다.

○…92년 동안 ‘자막이 있는 영화’가 이뤄내지 못한 그 어려운 걸 해낸 우리 영화 기생충(2019년)에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어떡해서든 ‘숟가락’을 얹으려는 봉준호 마케팅도 점입가경이다.

‘봉준호 거리 조성’ 등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파렴치함은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한 때 그가 블랙리스트 영화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정자들의 기막힌 태세전환에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공무원과 경찰을 비리 집단으로 묘사해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을 주입한다(A), 반미 정서와 정부의 무능을 부각해 국민의식을 좌경화한다(B),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운동을 부추긴다(C).’ 지난날 봉 감독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다.

A와 B는 2000만명이 관람하고 외신도 극찬한 살인의 추억(2003년)과 괴물(2006년). C는 걸작이자 지난 10년간 나온 작품 중 최고로 순수한 액션 영화(워싱턴포스트)로 평가받은 설국열차(2013년)다.

거장 쿠엔틴 타란티노가 ‘전성기의 스필버그’에 비유한 봉 감독이 트럼보처럼 음지로 사라질 뻔 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생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 가지. 하나는 정치권을 포함한 권력기관의 기생충은 반드시 박멸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 더, 권력이 예술을 간섭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비판과 저항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전제가 틀리지 않다면,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다 계획이 있는’ 수많은 봉준호를 위해 ‘하고 싶은 걸 다할 수 있는’ 사회를 마땅히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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