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시기, 전선조합 중심의 변화 필요
니치마켓(틈새시장) 등 성장가능성 있는 시장에 진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는 LS전선 시절 초고압 케이블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쾌속’ 승진한 능력자로 평가받는다. LS전선 전력사업부문장, 사업총괄 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지난해부터 가온전선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직장생활에서 ‘배움’을 강조하는 그는 재직 중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MBA 석사를 이수하기도 했다. 업계에서 이례적인 역사 전공자인 윤재인 대표를 만나 가온전선과 전선업계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전선업계가 전례 없는 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시장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나.​

가장 어려운 시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시장 수요가 크게 줄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전선 수요도 30~50% 수준으로 하락,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곳들이 다수 있다. 국내 건설투자가 적어졌고, 과거 국내 건설업체들이 다수 수주했던 중동 프로젝트가 줄어든 탓이다. 대체할 수 있는 해외 시장을 발굴한 것도 없다 보니 돌파구가 없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 등을 이유로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겠냐는 희망적인 예측도 있지만, 예측이 맞더라도 단기적 처방일 뿐 궁극적인 돌파구로 기능하기는 어렵다.

▶어려운 상황에서 전선업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국내 전선업계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시장 내 역할 분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기업, 중기업, 소기업 등 각 업체들이 분야별로 전문 영역을 나눠 갖는 등 산업 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지난번에 전선조합 중심으로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와 시도는 있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내 수요는 줄어드는데 업체들은 시장에 난립돼 있다. 새로운 공급자가 나타날 때마다 시장가격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시장 내 자발적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공생할 수 있다. 핵심 역량이 다른 중소기업 3~5군데 업체가 뭉치면 중견기업이나 대기업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오너들이 생각을 크게 전환해야 한다. 변화를 결심하지 않으면 결국 일부 업체는 문을 닫거나 다른 업체에 편입되는 등 자연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서로 연합해 경쟁력을 키우고, 이 같은 체제가 구축돼야 미래를 그릴 수 있다.

▶돌파구의 하나로 남북경협에 희망을 걸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남북경협은 분명 기회다. 그러나 북한 시장이 열리더라도 중국자본 역시 들어오게 된다. 중국 업체들과의 북한 내 경쟁도 불가피한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도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경협이 이뤄지면 수요는 지금보다 분명 늘어나겠지만 막연하게 아무런 준비 없이도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최근 위기 상황에서 가온전선은 어떠한 전략을 갖고 있나.​

더 이상 기존 레드오션에서 저가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력, 통신, 선박, 자동차 등 각 시장의 요구와 특성에 맞게 새로운 제품군을 개발, 저부가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화재가 빈번히 발생해 난연, 내화 등이 트렌드가 됐다. 또 친환경 바람에 따라 PP 케이블도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트렌드에 발맞춰 차별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가온전선은 대표적으로 국내시장 중심의 비즈니스를 해왔다. 국내시장에서도 니치마켓(틈새시장)에 강한데, 이를 위해서는 고객과의 소통이 가장 핵심적이다. 소통 과정에서 고객의 니즈를 캐치해 트렌드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응하는 시스템이 다른 전선회사보다 뛰어난 점을 더욱 살릴 생각이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신제품들을 키워서 하나의 사업군으로 만들 생각이다. 이를 위해 가요성 알루미늄 케이블(ACF), 산업용 이더넷 케이블 등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시장에 먼저 진입할 방침이다.

▶대표에 취임한 이후 가온전선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가온전선은 전통적으로 내수시장에 강한 기업으로, 현재도 비슷하지만 처음 가온전선에 왔던 2018년에는 수출이 전체 매출의 20%도 안 됐다. 제품군도 단순했고 대부분 범용 제품이었다. 이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탈피할 것이냐가 가장 큰 과제였다. 과거에는 내수에만 집중해도 사업을 잘할 수 있던 환경이었지만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영업이익률은 떨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해외시장에 주목했다. 수출도 하고 해외 생산 거점도 만들기로 했다. 해외에 유통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온전선 제품이 많이 팔릴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LS전선과 공동으로 미얀마 공장에 투자했고, 미국 전력 케이블 생산법인에도 일부 투자했다. 미국은 가장 큰 통신 시장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고 봤다. 현재도 해외 진출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해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해외에 파견하기도 하고 교육도 하면서 인력을 양성하는 중이다.

▶전선조합의 이사장과 전무가 바뀌었다. 어떤 역할을 기대하나.

국면 타개를 위해 정부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러나 정부가 물량을 푸는 것 역시 산업화와 도시화가 고도화된 현시점에서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제는 정부에 바라기보다는 전선조합을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최근에 변화 의지가 강한 홍성규 이사장이 오면서 조합이 개편되고 확고한 리더십을 갖춰 가고 있다. 강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전선조합이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조율자로서 산적한 논의들을 활발히 풀어나가길 기대한다.

▶리더로서 구성원들에게 당부할 것이 있다면.

조직 구성원들에게 ‘장기적인 승부를 하라’고 강조하는 편이다. 비즈니스에서는 ‘신뢰 구축’이, 직장생활에서는 ‘자기계발’이 장기적 승부를 위해 필요하다.

비즈니스 관계는 단기에 이익을 끌어내는 것 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일본 업체들과의 비즈니스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으로 알려졌는데, 한 번 신뢰를 쌓아두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관계를 유지, 사업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이 같은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비즈니스에 정직하게 임하는 것이 핵심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계산적으로만 임할 경우 관계 자체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은 첫출근 하는 신입직원들에게 꼭 전하는 말 중 하나다. 경쟁력 있는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넓고 새로운 시각에서 업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개인적으론 회사생활을 한 지 10년째가 되던 때 사내에서 제공하는 MBA 과정을 밟았다. 경영을 배우다 보니 새롭고 재미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 이후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MBA 석사를 수료할 기회도 왔다. 이후 회사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지하게 됐다. 경영학, 기술, 트렌드, 상식 등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더 성장할 수 있고 동기부여도 이뤄지게 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선산업은 한국 경제 역사에 기여한 바가 큰데, 현재 저평가받고 있다. 공정위 담합건 등으로 대외적 이미지도 실추된 상황이다. 또 금융업계는 전선을 마진이 낮은 저부가 산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35년간 전선업계에 몸을 담은 전선인으로서 이러한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

이를 탈피해야 한다. 전선업계의 현재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미래도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전선은 사회 인프라를 형성하는 기간산업으로, 신산업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재 양성과 인력 유입이 된다면 전선업계의 미래는 희망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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