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 홍보대행사 대표/칼럼니스트/스피치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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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오래된 종목인 스피드 스케이팅은 400미터의 빙상트랙에서 속도(시속 50~60km)를 겨루는 데 순발력, 가속력, 지구력이 요구된다. 1924년 제1회 프랑스 샤모니 동계올림픽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은 뒤꿈치 쪽의 날이 스케이트와 분리돼 추진력을 높이는 클랩 스케이트와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부터 몸 전체에 밀착 경기복을 착용한다. 달리는 선수들에게 0.0001초는 그들의 목숨이고 관중들에게는 심장을 졸이는 즐거움이다.

속도경쟁의 영역은 스포츠뿐 아니라 AI(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미래사회로 갈수록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4차산업의 핵심은 속도전이다. 1988년 음성중심으로 시작된 아날로그 이동통신은 1996년 세계최초 CDMA 상용화로 음성과 문자서비스, 저속인터넷을 14.4-153.6 kbps전송하는 데 32시간 소요됐지만 당시에는 혁명이었다. 이제 5G 시대의 도래는 현재 LTE보다 전송 속도가 20배 빠른 20Gbps, 전송 데이터 량은 100배, 지연속도도 100분의 1(0.001초)로 줄어든다. 초고화질VR, 홀로그램, 자율주행차, 스마트시티, 스마트팩토리 등 다양한 콘텐츠와 서비스들이 대거 출시될 것이다.

중국의 대표 IT기업인 알리바바는 사내 식당이 4개나 있는데도 8천명이 넘는 직원들이 식당에 몰리기 때문에 직장인에게는 1분이 아까운 점심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프로그래머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결제방식을 안면인식기술로 바꾸게 됐는데 직원들이 선택한 음식을 식판에 담으면 1초만에 누구인지 파악이 되어 요리별로 가격을 스캔하고 사원번호만 입력하면 자동 결제 시스템이 작동된다고 한다.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대에서 자동차와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속도의 향상이 주는 편리함과 발전을 누려왔듯이 속도는 갈수록 삶의 질을 너머 생존과 연관돼 가고 있다. 나 역시 팀장시절 팀원들에게 요구했던 것 중 하나가 빠른 일처리와 보고였다. 정확함과 신속함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신속함을 택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일단 빨리 해야 긴장감도 풀어지지 않고 수정할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른 것과 조급함은 다르다. 빠른 것은 효율을 내기 위함이지만 조급함은 인내심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한국인에게 못 하게 하면 못 견디는 일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닫힘 버튼 누르기, 커피 자판기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커피가 다 내려오기 전에 손을 집어넣어 미리 빼내기 등 모두 조급함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예전에 방송팀과 중국연수를 간 적이 있는데 몇 시간동안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하는 중국인들에 반해 한국인들이 들어가면 코스별로 서빙되어야 할 음식들이 한꺼번에 나오곤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예약 관광객이 한국인이면 ‘빨리빨리’라는 독촉이 나오기 전에 알아서 한상에 차려낸다는 말에 창피했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는 짧은 시간 내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성과주의와 부실공사를 낳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전장을 누비며 터득한 전법전술을 죽간 4천여점에 담은 손자병법은 인류 최초의 심리 전술 연구서이자 처세의 경전으로 전쟁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어 왔는데 저자인손자(孫子)는 ‘우직지계(迂直之計)’를 말한 바 있다.

때로 돌아가는 게 실제로는 빨리 가는 길이며 촉박하게 서둘러 일을 진행하기보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로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렇게 하면 근심을 이로움으로 만들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곤충 바이블 ‘곤충기’는 장 앙리 파브르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곤충 관찰 기록을 토대로 1879년부터 1907년까지 무려 28년에 걸쳐서 가난과 질병, 오해와 편견의 시련의 견뎌내며 10권으로 간행한 명작이다. 마르틴 아우어는 회고록에서 ‘파브르는 곤충을 끈기 있게 관찰하고 관찰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데 때로 몇 년씩 걸리기도 했으며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았다’며 ‘내려오는 지식들을 베껴 쓰는 관행을 따르지도 않았고 본인이 관찰하고 철저히 검토한 것에 대해서만 말을 하고 글을 썼다’고 전했다. 한 해를 시작하며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속도가 최고의 가치로 부각되는 이 시대에 속도보다 중요한 ‘방향’은 잘 잡고 있는지,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보고 때로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하며 돌아가는 기다림의 미학을 누리는 여유를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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