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6세기 후반까지 인류를 지배한 가치는 종교다. 시간을 통제한 것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1483-1546)가 1538년 “달력이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한 것은 당시 종교권력 강화에 달력이 꼭 필요했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루터 시대 이전이나 이후나 기독교는 시간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예언(?)이 맞아 떨어진 건지, 오늘날 달력은 등록과 마감, 계약과 유효 기간 혹은 직무수행, 세금 납기 등 모든 영역을 망라해 인간 사회를 지배한다. 달력은 곧 시간과 이음동의어가 됐고, 개인과 분리될 수 없는 물체가 됐다. 그 어떤 것보다 인간 삶을 강력하게 규정한다.

앨런 라킨은 저서 ‘시간을 지배하는 절대법칙’에서 끊임없이 시간에 대한 우선순위를 세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마치 ‘자유롭고 부드러운 근육의 상태’처럼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시간의 주인,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단 얘기다.

별안간 시간에 대해 장황하게 떠드는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게 다 한 해의 끝자락, 연말 때문이다.

○…시간 앞에서 더욱 초라해지는 이맘때만 되면, 머릿속을 맴도는 시가 하나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다. 짧지만 울림은 적지 않게 다가와서다.

흔히 (어디로든) 올라갈 때, 우린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목표를 향해 앞만 보느라 옆이나 뒤를 볼 겨를이 없다. 느슨함(여유)은 사치의 친구라 여기든가 마음 한 구석에 억지로 구겨 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잠시라도 멈춰서 바라봤다면 더 없이 좋았을 것들을 보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걸음을 재촉한다. 정상에 다다르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올 거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신기한 것은 내려올 때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거나 감지된다. 다행이지만, ‘왜 이제야’라며 후회할 때도 많다.

시간도, 사람도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연 초에 품었던 기대나 희망의 정산서를 받아들고 헛웃음을 짓는 것은 해를 마감하는 이맘 때 피하고 싶은 데자뷰다. 지친 숨을 내쉬며 달려온 것 같은데도 어딘가 아쉽다.

그래서 연말은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도, 간간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져도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허전하다.

최소한 1년이란 시간 앞에서 끝내 ‘성찰’이란 일종의 의식을 치러야하는 압도적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냉혹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너무 과도하게 우울하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은 결코 전쟁이 아니지 않은가.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경쟁에서 졌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올라갈 때’ 그 꽃을 만나서 향기를 맡고 때론 어루만질 여유가 있는 새해를 소망한다. 이 또한 어리석은 희망으로 남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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