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인 1980년대 주한영국문화원 어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몇 개월간의 과정을 끝낸 우리는 버스까지 빌려 교외로 MT를 가기로 하고 N분의 1로 돈을 거뒀는데 그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한 분한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60에 가까워 보이는 그분은 평소에 매번 같은 점퍼차림에 허름한 구두를 신고 있어 누가 봐도 실업자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조용히 돈을 걷은 사실을 알고 그분이 말을 걸어왔다.

“나한테는 왜 말 안했어?”

“저희끼리 부담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아냐, 그날 버스 빌리는 비용하고 식사는 내가 준비할게, 그 돈은 기념품 사는 데 써!”

“………아, 깜짝이야, 이건 뭐지?”

우리에겐 충격이었다. 그분을 따라 주차장에 내려갔는데 고급 세단에서 기사가 나와 차문을 열고 어르신을 정중히 모시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중견기업의 회장이었다. 드라마같은 장면이었다. 그 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났다.

수많은 공직자들의 멘토 역할을 해온 한 지도자와 최근 ‘판단’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젊은 시절, 우리나라에서 강직하기로 유명한 건설부장관 비서관을 지낸 분이다. 비서관 시절, 한번은 장관 공관에서 인터폰을 눌러 달려가 보니 한 젊은 공직자가 선물로 가져온 골프채를 응접실에서 침실로 옯겨 놓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방까지 몇미터 안되는 거리인데, 이런 심부름을 시킬 분이 아닌데, 더욱이 그런 뇌물을 받을 분이 아닌데…. 내심 실망했다. 1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그 장관은 비서관한테 그 젊은 공직자가 승진자 명단에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있다고 하자 오늘 저녁 그 부부를 공관에 초대해 저녁식사를 할테니 각별히 식단에 신경쓰라고 했다. 그 장관이 힘을 써서 승진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조리사한테 ‘두 명!’ 이라고만 전하고 홱 돌아섰다.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장관은 비서관한테 그 골프채를 다시 침실에서 가져오라고 시켰고 초대된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유능한 인재라고 들었네. 나는 필요할 때 골프채를 살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니 가져가서 젊을 때 운동을 열심히 해 오래도록 나라를 위해 일해 주시게!”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장관은 비서관한테 이렇게 말했다. “자네 그동안 마음고생이 컸지?”

장관이 표리부동하다고 생각해 사직서까지 제출하려 했던 비서관은 얼굴이 붉어졌다. 아끼는 비서관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난 1년간 말할 수 있었던 기회를 그 순간까지 수백 번이나 참아온 장관의 인격에 머리가 숙여져 평생 멘토로 모시게 됐다.

그 후로 그분은 새로 알게 된 사람에 대해 1년 동안은 판단하지 말자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1년 동안은 의지로 상대의 장점을 끄집어내 관계를 맺어나가다보니 1년 뒤에는 부족한 점이 보여도 이미 각인된 장점이 그것을 덮어버리더라는 것이다.

내가 일했던 극동방송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당직을 서고 있던 선배 앞에 나타난 촌스러운 옷차림의 청취자 부부가 방송사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길래 무선전화기를 든 채 친절하게 안내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적지 않은 헌금을 하고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이분들은 앞서 다른 선교방송에 갔는데 근무시간 종료됐으니 다음에 오라고 차갑게 외면한 게 섭섭해 바로 이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판단에는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판단이 있다. 칸트는 인식의 과정에서 감각과 경험을 중시했다. 인식의 대상이 먼저 직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되며, 직관에 의해 우리의 정신에 받아들여진 대상의 위상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규정된다고 했다.

지도자의 판단력은 한 기업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러시아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을 뻔 한 적이 크게 두 번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공에서 러시아는 많은 인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거듭되는 연승으로 자만해진 침략국 지도자들의 무모한 판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두 권력자는 러시아의 추위에 대비한 월동준비나 퇴각로와 보급로 파악 등 기본적인 전쟁준비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지 않고 승자효과에 도취돼 승리를 낙관했던 것이다. 리스크를 무릎쓰고 치른 전쟁이나 경쟁, 운동경기에서 승리할 때 사람의 몸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분출돼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수치를 올려준다. 높아진 도파민 수치는 더 큰 승부를 자극하는 동기를 부여해 승자효과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자만심에 빠져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갑의 위치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 퇴직 후 사회에 나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사기를 당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나의 선입견, 화려한 경력, 다양한 경험을 내려놓고 냉철하고도 겸손한 자세로 판단력을 키우는 훈련은 평생 계속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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