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년 전 시골 병원 모습 그대로 간직한 ‘빈민 구제원’

프랑스에는 자주 출장을 왔었지만 대부분 직원들과 파리의 패션마켓을 돌아보거나 프리미에르비종이라는 원단 전시회 혹은 가끔 메종오브제 또는 프레타포르테 같은 전시회를 위해서 온다. 파리라는 도시는 이런 큰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호텔 방 값이 천정부지로 비싸져서 하루라도 일정을 압축해 파리를 탈출할 궁리만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남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왜 빈센트 반고흐가 아를에 정착을 했는지, 왜 사람들이 남프랑스를 사랑하는지,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출장이 아니라 여름휴가를 이용한 테마여행 중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패션의 역사에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한 것을 충분히 연구해보고, 그녀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중이다. 나는 도빌을 거쳐 이곳 소므르에 왔는데 자동차로 300km 거리 정도의 프랑스 내륙 지방이다. 흔히 프랑스가 패션의 도시, 여성의 도시같이 느껴지지만 실제 프랑스는 농업 국가로 농업 수출이 국가를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프랑스 내륙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밀 추수를 마치고 끝없이 펼쳐진 멋진 벌판을 볼 수 있다.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시간이 좀더 넉넉하다면 소므르 가는 길에 나타나는 멋진 성도 둘러보고 즐기면 좋으련만 한여름 휴가에 시간을 내어 온 나로서는 그런 자유가 없어 섭섭했다. 그래도 패키지 여행이 아닌 자유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물론 아들이 자동차를 운전해주고 모든 것을 도와주니까 가능한 일이다. 고맙다는 말을 정식으로 못 한 것 같아, 지면을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녀와 여행한다고 해서 누구나 행복한 것도 아니고, 취향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더더욱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아들이 감사하다.

소므르는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난 빈민 구제원 때문에 왔다. 다행히 아직도 고스란히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프랑스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다. 한국이라면 133년 전의 시골 병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없을 테니 말이다. 한국은 시간을 압축해서 나라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전 세계가 알아주는 나라가 되었지만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잃은 것도 많다.

몇 년 전 오랜만에 명동에 들러 물만두로 유명한 취영루에 갔었다. 중국 대사관 가까이 있는 중국 사람이 하는 음식점이다. 그곳에서 어떤 60대의 남자분과 주인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는 30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3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아왔는데 모든 것이 변하고 다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이곳 취영루만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이고 옛 맛 그대로여서 너무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역시 중국 사람만이 끝까지 버티고 남아 있는 건가 생각했다. 이후로 그 앞을 지날 때면 한번 더 눈길을 주곤 했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곳도 화장품 매장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살아온 나에게 소므르의 빈민 구제원 병원은 그 자체로 감사한 건축물이다. 이제 이곳 소므르도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는지 아니면 휴가 시즌이라 모두 여행을 간 것인지 모르지만 동네엔 할아버지 몇 분들만 보일뿐 모두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흔한 카페도 근처에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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