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로소 본격 등장한 외교 행위다. 19세기 국제정치의 전반과 후반을 나눠 호령했던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 시대에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냉전이 시작되던 1950년 2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소련 최고위층과의 또 다른 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정상(summit)에서의 회담으로 인해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 유명한 에든버러 연설이다.

처칠이 산의 정상(頂上)을 의미하는 ‘summit’를 어떤 이유로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찌됐건 그때부터 정상회담은 ‘summit’ 또는 ‘summit meeting’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정상회담은 현대사의 결정적 변곡점이 된 경우가 많다.

이 중 1938년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뮌헨 회담’, 1945년 처칠-루스벨트-스탈린의 ‘얄타 회담’, 1961년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의 ‘빈 회담’은 오히려 하지 않는 게 나았을 뻔한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 회담은 전쟁을 막지 못하거나, 전쟁을 연장시켰고, 군사적 위기를 고조시켰다.

반면 데탕트 시대를 연 1972년 닉슨과 브레즈네프의 ‘모스크바 회담’,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베긴-카터-사다트)은 비교적 성공적인 만남으로 기억된다. 냉전의 해빙, 중동 전쟁의 종식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냉전의 종언을 알린 1985년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제네바 회담도 그렇다.

○…우리가 정상회담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고 지도자들의 합의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지라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대단히 효율적인 솔루션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모든 외교행위를 통틀어 가장 신속한 분쟁 해결 방법이란 것에 별 다툼의 여지가 없다.

4·27 판문점 선언은 ‘세기의 담판’으로 불리는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한 때 좌초되나 싶었던 6·12 북미 회담은 남북정상의 깜짝 만남(5월 26일)으로 다시 불씨를 살렸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달 동안 두 번이나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이 그렇다.

세계의 눈이 한반도에 쏠린 지금, 새로운 평화의 시작을 말하려면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대한 북미 정상의 원만한 합의는 꼭 필요하다. 이는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의미하는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과 뗄 수 없는 사안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시작한 전쟁을 21세기에도 끝내지 못한 곳은 지구상에서 오직 하나, 우리가 사는 한반도뿐이다. 다행히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

국제정치사에서 분단과 대결, 긴장과 공포의 대명사였던 한반도가 이제는 오랜 ‘지정학적 포로’에서 풀려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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