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진 수녀원, 디자인에 필요한 절대적 영감 줘

프랑스 오바진 수녀원 가는 길목의 풍경.
프랑스 오바진 수녀원 가는 길목의 풍경.

내가 읽은 샤넬 관련 책 중에 에드몽드 샤를루가 쓴 글을 보면 샤넬은 디자인에 필요한 많은 영감을 이곳 오바진 수녀원에서 받았을 것이라고 써놓았다. 에드몽드 샤를루는 샤넬의 C자가 겹쳐진 로고가 수도원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샤넬이 좋아하는 별 문양은 기도실 가는 통로 바닥을 장식한 돌로 만든 별무늬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라파우자’ 별장을 지을 때 건축가에게 오바진 수녀원의 돌로 된 계단을 설계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행을 다니며 알게 된 것 중의 하나가 한국과 유럽이 다른 점은 그들은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사람과 사람의 편지 왕래 같은 것도 모두 보관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편지 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곳곳에 남겨진 무궁무진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에 매우 편리하다. 에드몽드 샤를루는 샤넬과 관련하여 책을 쓴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신뢰받는 작가다. 그가 쓴 책을 보면 가브리엘 샤넬이 어떤 식으로 오바진 수녀원의 영향을 받아 멋진 디자이너로 성장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바로 그 오바진 수녀원을 찾아가는 중이다. 아직 도착도 하기 전이니까 꿈에 부풀 수밖에 없다. 가브리엘 샤넬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동선을 여행하며 그녀와 공감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오바진 수녀원을 찾는 이유다. 나는 지금 자동차로 이곳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옛날 아버지가 끄는 마차에 타고 이곳을 향하던 가브리엘 샤넬을 그려보면서 마치 내가 11살의 가브리엘이 된 듯 오바진 수녀원 근처의 산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변할 수 있어도 하늘이나 산, 멀리 보이는 마을 같은 풍경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렸을 시골길도 이젠 포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주변 모습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눈앞에 펼쳐진 것을 가브리엘 샤넬의 심정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성당이 가까워질수록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진 프랑스에서 이렇게 높은 산은 알프스가 가까운 쪽을 빼고는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지대에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선 하루 한 차례 오전 11시에 수녀원 내부를 투어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불어로만 설명한다고 해서 정말 유감이었다. 아마도 그만큼 그곳을 찾는 사람이 대부분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샤넬의 자취를 찾아서 그곳까지 갔는데, 그곳에 가면 책에서 읽었던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 먼 곳까지 갔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만 설명한다고 하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치 어린 시절 기대감에 차서 신나게 불던 풍선이 빵 하고 터져버렸을 때 느꼈던 허무감 같다고 해야 할까? 여행은 항상 이런 변수로 씨실과 날실을 짠다.

성당은 12세기에 지어진 곳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한다. 이토록 오래된 성당이니 역사에 대해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자랑할 것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내가 기대한 샤넬에 대한 내용은 마치 12코스짜리 디너에 장식한 작은 화병의 꽃만큼의 비중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투어가이드가 설명하는 동안 나는 혼자서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다니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유럽의 많은 성당을 보아왔는데 대부분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한 성당들이었다. 그러다보니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스케일, 대단한 예술적 표현에 익숙해져 있는 데 반해 이곳 성당은 매우 검소한 디자인에 단아한 분위기였다. 마치 내가 여태 보아온 성당들이 다보탑 같은 분위기라면 이곳 오바진 성당은 석가탑 같았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도리어 샤넬에게 남다른 심미안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인생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인 11살부터 7년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동생과 함께 성장하게 된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면 따뜻한 부모의 보살핌으로 자라야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자란 것이 도리어 성공의 발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인가 싶다. 또는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나는 운명론자이기 때문에 운명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덮어놓고 불행했으리라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격을 갖췄거나 준비된 부모에게만 자식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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