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한국전기공사협회 건축전기설비위원회 위원장
김경미 한국전기공사협회 건축전기설비위원회 위원장

바람에 초록잎 위에 내린 하얀 눈꽃이 흔들린다. 소복이 내려앉은 눈꽃이 바람에 날리지도 않고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 흔들린다, 손으로 한움큼 쥐어 뭉쳐보고 싶게 만드는 이팝나무 위의 하양 꽃송이들. 사진에 담아보려 휴대폰을 들었다가 갤러리로 들어가 사진구경을 했다. 얼마 전 나와 아홉 살 차이나는 막내가 휴대폰으로 전송해 준 사진. 내가 13살 정도 되었을 무렵의 사진이다. 우리 네 남매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다. 함께 어버이날 즈음 찍었을 것 같은 사진이다.

이 사진 속 할머니.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농사를 짓느라 종일 밖에 계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많다. 특히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놀거나 숙제를 하고 나서 저녁이 되면 할머니와 칼국수를 밀던 기억이 참 많다. 할머니가 밀가루 반죽을 하면 나와 여동생은 큼직한 도마를 앞에 놓고 홍두깨 대신 다듬이 방망이로 반죽을 밀었었다. 그리고 나면 어김없이 팥 칼국수나 멸치국물 칼국수가 저녁메뉴였다. 이렇게 학창시절 기억을 더듬어 할머니를 떠올리니 생각나는 게 참 많다. 고샅을 뛰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나면 마당 한편에 자라고 있는 애기똥풀을 찧어 무릎에 붙여주시곤 했었다. 그래서 산자락 끝에 봄볕을 보고 피어 있는 애기똥풀을 만나면 늘 할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또 뭐든 아까워하셔서 치약을 아껴 쓰시던 생각도 난다. 그때 치약은 지금의 플라스틱 재질 대신 얇은 금속재질의 튜브 안에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 쓰시다 못해 우리가 새 치약을 쓰는 동안에 튜브의 끝을 잘라내고 튜브에 남아 있는 마지막 치약까지 칫솔을 넣어 닦아 쓰곤 하셨다. 가족들이 가운데를 마구 눌러쓴 치약이 얼마 남지 않아 끝부터 밀어 치약을 정리할 때면 또 할머니가 떠오른다.

이런 할머니는 나의 기억 내내 허리가 많이 굽으셔서 손에는 늘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한 손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성경책이 든 큼직한 검은 가방을 들고 늘 새벽기도를 가셨고,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는 내 갓난쟁이 아이들도 돌봐주셨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이름을 부르신다고 이름을 한 번에 못 부르시고 우리 네 남매 이름을 모두 번갈아 한 번씩 부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를 대신해 우리들을 많이 업어주셨다는데 너무 어려서인지 할아버지에게 업혀 있던 기억은 없다. 대신 할아버지는 여름에는 하얀 모시한복을 입으신 모습과 소 풀 뜯기는 모습, 겨울에는 큰 가마솥에 구수한 냄새가 나는 소 죽을 끓이시던 기억이 난다. 소를 더 키우지 않게 된 뒤에는 흑염소가 그 대신이었다.

엄마, 아빠는 농사일을 하시느라 농사철이 되면 우리를 밭으로 많이 불렀었다. 특히 쉬는 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우리들 이름을 불렀고, 가기 싫은 밭에 불려가 봄에는 이런저런 모종을 들고 다니며 밭고랑에 놓아주기도 하고, 그것들이 자라고 나면 고추도 따고, 담뱃잎도 엮고, 배추도 나르고, 무도 나르고, 고구마·감자도 캐곤 했었다. 또, 일 마치고 집에 오신 엄마한테는 숙제 검사 뒤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러신 분들이 이제는 벌써 일흔을 넘기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셔서 당신들의 손주들에게는 야단도 없이 참 너그러우시다.

내 추억은 이렇게 할머니 중심적이다. 그 시절엔 많이 다투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그랬으련만 아픈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추억으로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기억이 나는 참 좋다. 길을 가다 애기똥풀을 만나도, 칼국수를 먹으러 식당에 가도, 어느 집 욕실에서 얼마 남지 않아 찌그러진 치약을 만나도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르니 말이다.

나이가 더 들어 내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내게는 행복한 기억이 많이 쌓여 있기를 바란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내 어릴 적 생채기 난 무릎 위에 찧어 언혀져 나를 쓰리게 만들었던 애기똥풀이 봄볕 길모퉁이에 노랗게 꽃을 피우다 나를 만나 어릴 적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을 소환해 주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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