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부와 큰 정부.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왔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와 비교우위론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리카도는 작은 정부를 선호했다. 이들이 주장한 작은 정부론은 국가의 임무를 개인과 사회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으로 한정한다.

반면 20세기 등장한 큰 정부론은 사회 간접 자본 및 공공재의 공급 증대와 함께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데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가 정부의 역할론이다. 보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진보는 큰 정부를 원한다. 평행선을 달리는 양측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국가의 책무에서 접점을 형성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명제에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고등학교 경제교과서 수준의 정부론을 꺼낸 이유는 지난 16일이 ‘세월호 참사 4주기’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의 추모가 이어지는 가운데 주요 포털 댓글란에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과 비교된다’ 또는 ‘지겹다’, ‘신물 난다’ 등의 댓글이 상위에 올라와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과 세월호 참사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국민들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서 목숨 받쳐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을 추모하며 국가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국가의 실종’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본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집단 트라우마에 빠졌다. 누군가는 4년이 아픔을 잊고도 남을 세월일 수 있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이들이 호소하는 피로감은 그들이 이 사건을 정쟁으로만 바라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형 재난의 구조 실패가 정권교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정권교체 이후에도 노란리본을 달고 희생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실종된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의 발로이다.

작은 정부론자와 큰 정부론자 모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역할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국가가 없다면 경제·사회·산업은 물론이고 삶과 일상도 영위할 수 없다. 노란리본에는 정치적 ‘논란’이 아닌 ‘국가의 회복’을 바라는 이들의 소망이 담겨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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