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호 전 조달청장
정양호 전 조달청장

이곳은 해돋이의 명소, 포항 호미곶이다. 어둠의 세상이 광명의 순간으로 바뀌는 극적인 해돋이 장면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동해안의 존재이유는 바로 멋진 해돋이와 시원한 파도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지난해 여름부터 매달 한 두 번씩 동해안을 찾고 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부산 오륙도 앞바다까지 조성된 해파랑길 도보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바다파도소리길이란 뜻을 지닌 이 루트는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져 있어 늘 시원한 바다를 보며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늘은 이 길은 14번째로 걷고 있다. 지난번 지진 때문에 건너뛰었던 포항구간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다음번에 미뤄두었던 울산구간을 마치면 770킬로미터의 ‘해파랑길’ 도보여행 대장정이 완성된다.

지난해 중순 33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날을 설계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는 의미에서 해파랑길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안내서와는 반대로 고성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해 가족들과 함께 첫 발을 내디뎠다. 두 번째 여행부터는 가족들이 포기해서 나 혼자만의 여행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내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해서 장기전으로 변했다. 아내의 직장 때문에 주말을 이용해 한 번 내려가면 1박 2일 코스로 약 50km를 걷고 돌아오곤 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더니 이젠 벌써 그 끝이 보인다.

도보여행은 삶의 속도를 변화시킴으로써 같은 경험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우선 도보여행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는 작은 일에도 감동하게 만든다. 해뜨기 전에 출발해 새벽길 걷다 아침 식사가 가능하다는 식당 간판을 보면 너무 반갑다. 길가에서 파는 강원도 찰옥수수 하나 사서 먹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뿌듯해진다. 커피 한 잔, 샤워할 수 있는 숙소, 시원한 물 한 모금 앞에서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여행 도중에 쓰는 돈은 같은 값이지만 그 효용가치는 엄청나게 커지는 모양이다.

도보여행은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바닷바람이 내 얼굴을 어루만질 때 지그시 눈을 감고 행복에 빠지기도 하고, 잠시 발길을 멈추고 이름 모를 들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재미는 오롯이 도보여행자들만이 느끼는 특권이다. 방풍용으로 심어진 바닷가 소나무를 가득 채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어렴풋한 옛 고향 모습과 아련한 어릴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행복을 자동차 여행으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도보여행은 굳이 아웅다웅 하면서 살지 않아도 인생은 풍요해질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일깨워 주었다.

우린 변화와 혁신이 일상화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젠 힘센 물고기가 약한 놈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놈을 잡아먹는 시대라고 한다. 세계와 경쟁해야 할 기업인들은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도 무한의 속도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지금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고 모두들 야단인데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린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을 더 빨리 달리기 위한 경쟁에는 익숙하다. 전기 분야만 보더라도 우린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해 발전소를 계획보다 빨리 완공하고 전력망을 신속히 확충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속도 경쟁만이 지속될 것인지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보다는 효율적인 에너지 소비시스템, 친환경적인 분산형 전원,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같은 신산업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가던 길을 멈추고 삶의 속도를 바꿔 현재 상황을 점검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달리는 차는 우리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할 수 있지만 목적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개인적 측면에서는 나만의 도보여행도 좋고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여행도 좋겠다. 사회나 조직 측면에서는 원점에서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때때로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강원도 추암 촛대바위의 장엄함과 정동진 부근의 바다부채길의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추억 속에 간직될 것 같다. 또한 동해안을 내려오면서 본 크고 작은 몽돌해변가의 파도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린다. 이번 동해안 해파랑길 도보여행은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제2의 삶을 시작하는 데 작은 등불이 되었다. 앞으로도 삶의 각 단계마다 이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나의 삶도 대나무 줄기처럼 의미 있는 마디를 하나씩 남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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