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논어 자한편 27장에 나오는 구절로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라는 뜻이다. 한여름에는 나무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추위가 찾아오면 다른 나무들은 나뭇잎의 빛이 바래지고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게 되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고 한결 같은 잎을 유지한다. 이 구절이 유명해진 이유는 추사 김정희가 이 내용을 배경으로 그린 ‘세한도(歲寒圖)’ 때문이다. 24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요직을 거치며 병조참판까지 올랐던 추사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여 일생 동안 귀양살이를 한 기간이 무려 13년에 이르게 되었다.

세한도는 제주도 귀양살이 5년째에 그린 것이다. 많은 지인들이 왕래를 끊었고 귀양 2년째에 아내를 여의고 절해고도에서 외로움에 시달릴 때였다. 그러나 제자인 이상적이 중국에 갔다 올 때 마다 귀한 책자를 구해와 전해주곤 했다. 모두 외면할 때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의 변치 않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세 장을 이어 붙인 거친 종이 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조선시대 문인화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추위 가운데 소나무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존재의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호황기에는 어느 기업이나 실적을 자랑하지만 사업 환경이 악화되면 잠재되었던 약점이 드러나면서 위기상황에 내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불황기에도 지속가능한 경영 모델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중 '불황에도 더 잘나가는 불사조기업' 이란 책에서는 일본의 20년 불황에도 불구하고 연 10% 이상 성장한, 이른바 잘나가는 52개의 일본기업을 분석하고 있다. 이들을 불사조기업으로 선정하고 장기 불황에도 지속 성장한 비결을 분석했더니 다섯 가지 성장 DNA를 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고객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소통하는 고객친화적 영업력이다. 둘째는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전문성이다. 셋째는 내부고객인 직원들의 높은 수준의 결속력이다. 넷째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고객과 지역사회에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회적 친화력이다. 다섯째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틀을 깨는 창의적 역발상이다. 일본의 유례없던 장기 불황의 시기에 많은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불사조 기업들은 자신들만의 해답을 찾아내어 성장 기회를 붙잡았던 것이다.

다섯 가지 성장 DNA는 우리 회사를 돌아보았을 때도 동일한 원리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온전선은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선제조사이다. 11월 10일 창사 70주년 행사를 가지면서 당사 70년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봤을 때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 온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2차례의 오일 파동과 20년 전의 IMF 사태, 10년 전의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경제 혹한기를 거치면서 당사 고유의 생존 DNA가 장착되었다. 고객 친화적인 밀착 영업을 통해 국내 민수시장에서 최고의 점유율을 확보하였다.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으나 임직원들이 끈끈한 결집력을 발휘하며 위기를 돌파하였다. 일례로 당사의 통신사업은 공급부족과 공급과잉 사이클이 짧아서 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사업이다. 통신회사에서 다음 세대 통신망을 구축하는 기간에는 호전되다가도 통신망 투자가 완료된 후에는 수주가 감소하여 사업에 많은 부침이 있었다. 이때 고객의 숨은 요구를 찾아 이에 대응하는 신제품을 개발하였고 시장에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규모가 큰 전력제품 중심으로 움직이던 영업이 통신제품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면서 어려운 환경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통신사업이 강한 체질을 덧입게 된 것은 전방산업에서 자주 맞는 찬바람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APEC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서 한중관계 정상화를 논의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서 한한령이 발령되자 우리 경제에 엄청난 한파로 닥쳐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올해 한국 경제가 명목 GDP의 약 0.5%에 해당하는 총 8조5000억원의 경제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한한령이 해제될 조짐에 안심할 때가 아니다. 이제 수출과 교류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수출을 다변화하고 차별화된 제품과 컨텐츠를 준비하여 체질을 개선해야 할 것이다.

내년도 사업 계획을 수립하면서 내다본 2018년 사업 환경은 결코 녹록치 않다. 건설산업을 위시한 전방산업이 저성장으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해외시장은 중국과 후발업체 공세로 가격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내년 사업 환경의 온도에 맞는 체력을 준비할 때이다. 마침 회사 주변에 새로 심은 소나무가 겨울을 예고하는 추위 가운데서 홀로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다. 저성장 가운데 지속 경영을 추진하는 기업인들에게 롤모델이라도 되는 양 기품을 내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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