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사기(史記)에서 유래된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조나라 평원군이 초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교섭단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배경이다. 모수라는 한 식객이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였으나 평소 3천여명의 식객 중에서 들은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평원군은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라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모수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아직 주머니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주머니 속에 넣기만 하면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올 것이라며 설득하였다. 두 사람의 ‘썰전’은 모수가 일행에 가담하여 교섭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게 된다. 그래서 낭중지추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어도 두각을 나타낸다는 뜻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수의 사례를 현대 경영에 적용한다면 어떤 기업이 낭중지추에 해당될 수 있을까?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진 히든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든챔피언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기 분야에서 특화된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지배하여 결국 알려질 수 밖에 없는 기업이다. 얼마 전 모 CEO 포럼의 회원사 견학 프로그램을 통해 K뷰티의 히든챔피언이라고 불리는 한국콜마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30년이 넘게 전선 제조업체에서만 근무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다른 산업계에서는 어떻게 사업을 영위하고 이익을 창출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콜마는 화장품 사용자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ODM(제조자 개발 생산)이라는 신개념 비즈니스 모델을 업계 최초로 실현한 선두기업이라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품,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사업 영역에서 동사는 스스로 유통과 판매를 전혀 하지 않고 글로벌 메이저 업체들에게 개발·생산한 제품을 공급하는 ODM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최고로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총력을 기울여 월드 베스트 제품을 연구·개발하고 생산하여, 글로벌 유통망을 가지고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지불하면서 판매를 잘할 수 있는 메이저 화장품업체들에게 제품을 공급해 주는 비즈니스 모델! 이것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전선업계 중소기업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벤치마킹할 수 있는 모델로 제안한다. 현재의 전선업계 중소기업들의 사업 모델은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전선업계는 OEM 방식을 통해 너무 쉽게 제조업에 진입하고 사업을 운영해 온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으로부터 제품 사양을 받고 기술 지도까지 받아서 OEM 제품들을 생산하다가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자주 독립을 선언하고 자체 브랜드로 시장에 진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방식이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가치를 제공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국내시장 공급과잉과 불량전선 시장 유통이라는 역효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중소기업 사장님들을 만나보면 모두들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제품을 국내나 해외시장에 파는 일이 많이 어렵다고들 한다. 정말 중소기업들이 월드 베스트 제품을 연구· 개발하고 생산을 해낼 자신이 있으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투자를 할 수 있다면 전선업계도 이번 기회에 사업 방식을 바꾸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대기업과 수출 전문기업은 해외판매와 유통판매를 전담하고, 중소기업은 ODM 방식으로 제품을 개발,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좁은 국내시장이라는 주머니를 뚫고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중소기업 사장님이 특화된 신제품을 들고 와서 함께 협력을 상담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반대로 본인들이 특별히 잘하는 분야에 경영역량을 집중하고 못하는 사업분야에서는 과감하게 철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 분야에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고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라면 잘하는 업체에게 사업을 이관시키고 다른 사업을 찾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한 선택이다. 실제로 기존 업체들이 어렵게 사업을 유지해 나가는 영역에 사업 확대라는 명분 하에 추가로 진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그 결과는 전선업계의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꼴이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사업운영 경쟁력을 상실했다고 판단되는 업체들은 자율적으로 통폐합을 하거나, 나보다 더 잘하는 업체에게 사업을 이양하고 철수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 될 것이다. 모든 사업의 철수 전략을 구사할 때 가장 극복하기 힘든 요소 중의 하나가 정서적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선대 회장이 창업한 회사를 내 세대에 와서 문을 닫을 경우 죽어서 조상님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정서적 요소가 후대 사업가들이 과감하게 사업 철수의 결정을 가장 어렵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같이 슬로 데스(Slow Death)로 가는 경영환경을 유지하는 것보다 과감하게 현상타개에 나설 때 조상님들 그리고 후손들 앞에서 더 떳떳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전선업계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는 모델로 발전하기 위해서 중소 전선업체의 낭중지추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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