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전력부문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신고리5·6기 공론화, 전력수요전망 대폭수정, 노후 석탄과 원전의 수명연장 폐기, 신규 석탄과 원전의 중단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갈등없이 이행되지는 않겠지만, 정부의 대선공약이었던 만큼 큰 흔들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OECD 국가들에서 유권자들이 전력정책결정에 자신의 의사를 직접 관철시키는 추세와 대동소이하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이라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으나, 국제기구들과 글로벌 시장마저 동일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어 대세임은 분명하다. 기후변화, 후쿠시마사고 등 전통적 기저부하 발전설비로 인한 환경피해가 대두되면서 탈핵, 탈석탄은 OECD에서 거스르기 어려운 추세다.

세계은행은 이미 2013년 석탄화력과 원전에 대한 차관지원 중단을 선언했고, IMF는 수년째 세계 각국에 석탄화력에 대한 과세를 촉구하고 있다. 국제자본시장 역시 신규원전 투자를 중단한지 오래되었고, 한국의 UAE 원전건설사업도 결국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실패했다. 프랑스전력공사가 추진하다 치솟는 건설비용을 감당못해 중단했던 영국의 힌클리포인트 원전 역시 민간투자자를 못 찾아 결국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진행중이다. 반면 애플, 아마존 등 글로벌 IT기업들은 자사 소비전력의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는 목표하에 실제로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있다.

1970년대 샤이크 야마니 사우디 석유장관의 유명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는 경고는 오늘날 한전이야말로 되새겨야할 말이다. 그간 한전의 경쟁력은 공급측에서 원전과 석탄화전을 싸게 건설하고, 수요측에서 극단적인 계시별요금제와 주택용 누진제로 세계최고의 부하율을 유지해온 결과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현재의 한전체제가 몰락한다면 그건 원전이나 석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거부한 결과일 것이다.

물론 한전도 표면적으로 정권의 변화에 따라 각각 ‘스마트그리드’, ‘빅데이터’를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내세워왔다. 이미 추억으로 사라진 ‘스마트그리드’는 차치하고, 한전의 빅데이터만 잘 모아서 활용하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사실 한전은 OECD에서 몇개 안 남은 국가독점 전력사 중 하나이기에 세계 최대의 빅데이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한전의 빅데이터 자체가 정말 미래의 자산이 될까?

지난 2000년대 내내 세계 최대 휴대폰 공급업체였던 노키아는 어떤 경쟁자보다 방대한 소비자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스마트폰 시대의 등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다 일순간 몰락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노키아가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한들, 그것은 오직 노키아체제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데이터일뿐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소비자들에 대해 눈을 가리는 장애물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한전의 극단적 계시별요금제와 주택용누진제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데이터들을 잔뜩 모아봤자 그 자체로는 한전체제의 데이터일뿐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혜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데이터를 보면 볼수록 한전의 ‘우수성’에 대한 자화자찬만 늘어날 뿐이다.

요즘은 ‘4차산업혁명’이 새로운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변화와 맥락을 못 읽는 좁은 세계관에서 나오는 논리들은 기껏해야 ‘4차산업혁명과 전기차를 위해서 원전이 필요하다’ 따위로 진부할 뿐이다. 물론 한전체제가 당장 몰락할 일은 없다. 특히 현 정부가 ‘시장’을 혐오하기 때문에 한전은 향후 5년은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한전에게 묻고 싶다. 그것으로 만족하는가? 그 좋은 두뇌들로 ‘거봐, 원전 폐쇄하니 전기요금 오르지?’라고 손가락질하거나, 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행어 끼워 맞추기나 하며 한전체제에 안주하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전의 ‘시대적 사명’은 원자력으로 전기다소비 업종들에게 싼 전기를 공급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전기를 싸게 공급한들 중국업체들과 더 이상 경쟁이 불가한 저부가가치 업종들이거나, 더 이상 싼 전기요금이 큰 의미없는 고부가가치 업종들로 나뉘는 시대가 되었다. 싼 전기요금으로 선순환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것이다.

‘스마트그리드’던, ‘4차산업혁명’이던 새로운 부가가치는 한전의 전후방으로 정보통신, 신재생에너지와 융합한 새로운 시장과 업종들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물론 이를 위해선 ‘창조적 파괴’와 한전체제를 깨야하는 고통스러운 준비도 필요하다. 이에 동의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준비하면 어떨까?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

석광훈 프로필

1970년생

1996년 녹색연합 에너지환경담당

2002년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위원

2007년 도쿄대 법정대 공공정책연구원 객원연구원

2016년 이화여대 소비자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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