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 짧은 분홍실을 부챗살처럼 펼쳐놓고 마치 화장 솔을 벌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꽃을 피우는 자귀나무가 나는 참 좋다. 고향집 뒷산에 키 큰 자귀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산들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리는 연분홍색 꽃이 우산처럼 피었다.

24년 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할머니는 지금도 아주 가끔 꿈속에 나타나 아득한 추억 저편의 세계로 내 손을 잡아끄신다.

받침돌 틈새로 채송화, 봉숭아가 숨어 피는 장독대. 아욱이며 머위, 토란 따위가 자라는 작은 텃밭 둘레로 조피나무 골담초 개복숭아나무 고염나무가 한 두 그루씩 서 있는 뒤란이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송화를 물에 풀어 휘젓고 계시는 쪽진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수비(水飛)끝난 송홧가루는 조청과 버무려 송화다식을 만드실 것이다.

경부선을 타고 가면 추풍령 조금 못미처 황간이란 조그마한 도시가 있다. 그곳에서 백화산을 오른쪽에 끼고 휘어진 길을 50리 올라가면 고만고만한 초가집들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어깨를 맞대고 있는 마을. 내가 어렸을 땐 ‘득수골’이라 했는데, 행정명으로는 유방리(柳坊里)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까, 갓 스물 총각선생님 앞으로 ‘화산초등학교 젖통분교 ㅇㅇㅇ'라고 쓴 편지가 와 봉투를 뜯는 선생님 얼굴이 빨개졌다.

학교에서 집주소를 쓸 때나 면사무소 서기가 호구조사 같은 걸 할 때 ‘유방리’란 동네이름이 많이 부끄러웠다. 모두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득수리(得水里)로 바뀌었다.

강밭기로 동네에서 소문난 할머니,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만은 끔찍이도 사랑해서 자연 샘바르게 된 막내고모와 참 많이도 싸웠다. 5,60년대를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보릿동에는 허기가 져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회상하지만, 워낙 식구가 적었던 덕분일까, 배고팠던 기억은 그다지 없다. 아니 오히려 젖 부족으로 또래들보다 형편없이 작고 부실한 손녀에게 애써 무언가를 먹이시려는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만 있다.

십리 넘게 걸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얼른 부엌으로 가 솥뚜껑을 열어본다. 찬밥에 엿기름물을 부어 알맞게 삭인 단술(식혜)이 한 사발 들어 있다. 약간 쉰듯하면서도 달착지근해서 입 짧은 내 간식으로는 그만이라며 할머니는 들에 나가시기 전에 늘 딱 한 사발만 만들어 온기가 남아 있는 무쇠밥솥 안에 넣어두시곤 했다.

단술도 먹기 싫다고 칭얼거리면, 부랴부랴 멥쌀 서너 홉을 물에 담갔다가 들에서 돌아오자마자 절구에 빻아 백설기를 만드신다. 하얀 백설기는 할아버지와 내게 주시고, 당신과 고모는 시루 바닥에 깔았던 감 껍데기만 드셨다. 달고 맛있다고 하셨지만, 그런 날은 어김없이 할머니 몰래 고모에게 꼬집혔다.

할머니는 먹거리든 입거리든 맛있게 보기 좋게 만들어내는 분은 아니셨다. 대신 거칠고 투박하지만 어설픈 그대로 짬짬이 손을 움직여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셨다. 뒤란 장독대 큰 단지 속에는 찹쌀풀 발라 말린 가죽 부각이며, 송홧가루 콩가루 감 껍데기 가루로 만든 색색의 다식이며, 명절 때 쓰고 남은 가오리 포, 문어 다리, 흥건하게 단물이 고인 고염사발 등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백화산 중턱에 있는, 아무리 실타래를 풀어넣어도 끝없이 들어간다는 용수샘으로 소풍가던 날, 할머니는 들기름에 볶은 메뚜기가루로 속을 넣은 김밥을 싸주셨다.

이불호청 뜯어 집 앞 개울바닥에 펼쳐 깔고 밀을 이는 날이면 햇보리밥 지어 나르는 할머니랑 고모 어깨너머 뒷산 자귀나무 가지에서 한 무리 산새들이 날아올랐다.

이남숙(아시안프렌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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