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초(楚)나라 장수 항우는 구원병을 요청한 조나라를 돕기 위해 출병했지만 막강한 진나라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항우는 군대가 장하강을 건너자 타고 왔던 배를 모두 부숴 침몰시키고 식량은 사흘치만 남기고 솥을 모두 깨뜨리리라고 명령했다. 살아 돌아갈 방법은 오직 승리뿐인 상황에서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고 파부침주(破釜沈舟․솥을 깨고 배를 빠뜨린다)라는 고사성어도 탄생했다.

공급과잉이라는 구조적인 악순환중에 있는 한국 전선업계도 이제 '파부침주'의 자세로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과거 대한민국 전선업계는 여타 산업 대비 수익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던 반면 외부 환경이 변하더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었다. 사업환경이 한두 해 어렵더라도 긴축 경영을 하고 버티기만 하면 다시 호황기를 맞이하곤 했었다.

그러나 국내 총공급이 국내 총수요를 초과하면서 구조적인 과잉경쟁과 불황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외 건설업이나 조선업 같은 전방산업의 부진으로 사업환경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들과 일부 중견업체들은 일찌감치 해외시장을 개척해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하고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반면에 국내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일부 중견기업들과 중소 전선업체들은 전방산업 부진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아 일감 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선공장의 설비 가동률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하나의 작은 일감이 나왔을 때 수많은 업체들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저가로 일감을 수주해 가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선공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이 난국을 극복하고자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하는 종사자들이 모여 논의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서 산업 합리화라는 화두가 던져졌고, 논의를 통해 전선업계는 자발적으로 사업 구조조정에 이르게 됐다.

이 가운데 경기도 안산 소재 전선 중소기업인 아이티씨가 대한엠엔씨를 인수하고 기존 공장을 강원도 춘천으로 이동하면서 생산하는 제품 구성도 바꾸는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과거 전선업계는 부실기업이 경영 악화를 감내하다 한계에 부딪혀 부도가 나면 신규 사업 참가자가 인수해서 다시 공장을 가동시키는 방식이었다. 많은 부실업체가 넘어져도 보유 생산 설비는 그대로 유지되었기에 공급과잉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아이티씨의 인수 방식은 과거 관행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부가가치 생산 설비는 정리하고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해 나가는 형태이다. 필자는 이 사건을 ‘전선업계의 First Penguin’으로 칭하고 싶다.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은 2008년 미국 카네기멜론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의 죽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이다.

펭귄들은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추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범고래나 바다표범 같은 포식자들이 도사리고 있어 바다에 쉽게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때에 가장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이 따라오도록 이끄는 펭귄이 ‘퍼스트 펭귄’이다. 경영학에서는 이 용어가 위태로운 경영환경에서 도전정신을 발휘해 다른 시장 참여자들에게도 참여의 동기를 유발하는 선발업자를 의미한다.

과거 일본 전선업계를 보더라도 6개의 전력선 제조업체가 규모에 상응하는 짝짓기를 통하여 3개의 전력케이블 생산업체로 변신한 사례가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자발적인 의지로 추진하는 전선업계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구조조정이 가속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업계만 자율적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해당 업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전선 관련 유관 기관들의 합리적인 지원이 있을 때 전선산업 선진화는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정부에서 시행한 기업활력법이 전선업계의 공급과잉 해결을 지원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국가 산업을 인체로 비유하자면 전선산업은 혈관과 신경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선업계가 이제 자발적이고 건전한 구조조정을 통해 강한 체력을 회복하면서 앞으로 Global 시장과 통일한국에 대비하는 장기 Vision을 가지고 변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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