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터칭마이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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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인색한 계절의 한낮은 여름으로 치닫는 중이다. 비로 온몸을 흠뻑 적시고 촉촉해진 대지 속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뜨거운 햇빛을 받아 한껏 살이 올라야 할 곡식들의 몸이 저마다 수척하다. 물이 부족해 모내기를 시작하지 못한 곳도 많다. 그저 무심히 맑은 하늘 아래서 논밭은 노인의 손등처럼 말라서 갈라지고 비틀어진다. 주름진 땅에서 농민들의 마음은 시름에 젖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가 있다. 영화는 그 비들을 스크린에 담아 사람들의 마음에 다양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비는 오물 그득한 감옥의 기나긴 하수관을 기어 나와 죄수복을 던져 버리고 두 팔을 벌린 이에게는 자유였고(쇼생크 탈출), 펼쳐든 외투를 우산 삼아 캠퍼스를 달리는 연인에게는 사랑이었다(클래식). 흠뻑 젖으면서도 흥겨운 춤과 노래로 거리를 누비는 배우에게는 기쁨이었고(사랑은 비를 타고), 미래 도시에서 빗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사라질 운명을 얘기하는 안드로이드에게는 슬픔이었다(블레이드 러너). 먼저 떠난 엄마와 아내를 그리워하는 아들과 아빠에게는 기적이었고(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족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가며 사투를 벌이는 선원들에게는 절망(퍼펙트 스톰)이었다.

나의 기억에 저마다 다른 감성으로 저장된 채 잊힌 영화 속 여러 비들은 현실의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예고 없이 되살아나곤 한다. 계절마다 비는,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파고들어 가슴 속에 내리는 법이기에. 끔찍한 사건과 범죄를 다룬 영화들 속 시공간을 채웠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음습하고 괴기스런 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비는 잠들어 있던 우리의 순수한 감성을 건드린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누군가의 추억에서는 영화가, 또 누군가의 추억에서는 노래가 길어 올려진다.

당신의 비는 지난날에서 어떤 추억을 끄집어내어 당신의 마음을 뒤흔드는가? 이 계절, 메마른 대지 앞에서 농민들이 비를 기다리는 심정에 당신의 마음은 닿고 있는가?

세상의 수많은 비 가운데 가장 고마운 비는 단비다.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 단비라는 단어는 어린 시절의 여름날 마셨던 시원한 설탕물을 연상케 한다. 냉수가 풀어 주는 갈증만으로는 달래지지 않았던 더위는 설탕 한 스푼의 달달함에 사라지곤 했다. 단물은 지치고 허전한 마음마저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단물처럼 농민들을 위무하고 웃음 짓게 하는 단비가 쏟아지기를, 뙤약볕 속을 걸을 때마다 나는 바랐다.

비처럼 물처럼 누구에게나 단사람이 필요하다. 운명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 함께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실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고마운 사람. 그리울 때면 어느새 빙긋 웃으며 곁에 다가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형편의 옹색함을 얕잡지 않으며, 자신의 가능성을 변함없이 인정해 주고 더 나아질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삶의 이유가 된다. 단 한 명의 단사람이 있을 때 삶을 향한 우리의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단사람이 있는가?

지자체마다 가뭄 피해를 막기 위해 긴급대책을 세우고 일손을 모으고 있다. 단비가 오지 않으니 쓴물이라도 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하늘의 무정함은 오직 사람들 간의 유정함으로 극복된다.

날씨처럼 누구나 예기치 않은 삶의 고통과 맞닥뜨린다. 비를 맞을 때가 있고, 목이 마를 때가 있다. 고통은, 함께 비를 맞아 주고 함께 목마를 줄 아는 사람의 존재로 극복된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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