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터칭마이크 대표이사
오종호 ㈜터칭마이크 대표이사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들어온다. 맨발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 부드럽다. 햇살도 바람을 따라 거실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길게 눕는다. 노랗게 칠해진 햇살의 영역 안으로 슬쩍 발을 들이밀면 봄기운이 발을 타고 온몸에 퍼진다. 그리운 사람의 미소처럼 휴일 낮 햇살의 온기는 따뜻했다.

계절은 기억을 데리고 돌아온다. 4월도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4월의 사적, 공적 기억들은 현재로 소환되어 현실과 버무려진다. 이웃나라에서 넘어오는 희뿌연 먼지에도 아랑곳없이 휴일 낮의 창문을 열어젖힌 채 노란 햇살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는 스마트폰의 선명한 화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치어리더들의 안무와 관중들의 응원가로 야구장은 흥겨웠고, 대선 주자들의 언쟁은 치열함을 더하고 있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로 그득한 불황시대의 경제기사들 속에서 개인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일반인들은 죽을힘을 다해도 벌기 어려운 돈을 자본주의 능력자들은 사막에서 모래 퍼 올리듯 벌어들이고 있었다.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텍스트만큼이나 많은 상품들이 구매자들을 만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져버리고 나서 햇살에 물든 거실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버렸다. 햇볕에 닿은 뇌리 속에서 기억들이 덩이져 꼬물거렸다.

몇 년 전 이맘때 훌쩍 떠난 남해의 두모마을에 넘실거리던 유채꽃들은 햇빛에 그을린 듯 샛노랬다. 다랭이마을 아래에서 너울거리던 바다는 하늘빛을 다 품은 듯 짙푸르렀다. 군복을 벗고 복학하기 전 무작정 달려가 만났던 지리산의 안개 냄새와 여수 밤바다의 물비린내, 돌산의 갓김치 냄새와 통영 앞바다에서 먹었던 라면 냄새가 코에 되살아났다. 현실로 불려온 기억은 당시의 감각을 그대로 실어 온다. 꿈속의 일들이 신체적 느낌을 생생하게 동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냄새는 가장 강렬하다. 기억 속 어디에 어떤 신호로 냄새가 저장되어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랑했던 연인의 체취든, 한 순간 반해버린 향수 냄새든, 부엌에서 보글거리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든, 냄새는 시공을 뛰어넘어 되살아온다. 포옹할 때마다 15살 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와 6년을 함께 살아온 지교라는 이름의 개의 털에 배인 냄새를 나는 언제 어느 때든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매년 4월이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4월의 바다에서 살아나올 수 없었던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국민을 지키는데 무력했던 국가의 무능과 이념을 끌어들여 사람들을 편 갈랐던 자들의 잔인함을 기억해야 한다. 4월이 아니라도 매순간 현재의 코끝에 맴도는 냄새의 기억으로 고통 받을 누군가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4월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공유자로서 우리 기억의 일부분은 반드시 공적 영역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며, 공적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세상에는 확률적으로 불운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 불운과 맞닥뜨린다. 능히 벗어날 수 있었던 불운조차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 다수의 기억에서 소멸시키려 하는 사회, 누군가의 불운이 살아남은 자의 고통으로 현화(現化)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확률은 우리 모두를 누군가와 살아남은 자로 노리고 있다. 세월호의 기억은, 그 차가운 바닷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따뜻했던 사람들의 냄새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햇살의 꼬리가 발끝을 떠날 무렵 곧장 바람의 체온이 내려갔고 몸이 제풀로 움츠러들었다. 4월은 여전히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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