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방송작가
이용규/방송작가

아침에 마당에 나가서 깜짝 놀랐다. 어제만 해도 감감무소식이던 정원에 분홍색 꽃망울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노루귀라는 꽃이었다. 그리도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어떻게 저리도 연약한 꽃잎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일까.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심쿵하여 주변을 돌아보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녀석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튤립은 벌써 굵은 입대를 여기저기 내밀고 있으며, 미스김라일락 역시 잔뜩 물이 올라 금방이라도 잎을 뱉어낼 것인 냥 도움닫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기온은 아직 차갑지만 어느새 땅은 데워졌고, 만물은 봄을 부르고 있다. 지상의 봄도, 우리의 삶의 봄도 빨리 왔으면 좋으련만.

엊그제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돼 집으로 돌아갔다. 탄핵이유는 헌법수호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력보다 엄중한 게 헌법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판결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민주적인 절차였다. 시민의 힘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일궈낸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눈물이 그 속에 들어있으며 얼마나 많은 슬픔과 노고와 열정이 그 안에 숨어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가끔씩 국가란 무엇일까, 국민이란 무엇일까, 또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곤 한다. 결론은 항상 같다. 어떤 국가도 국민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베트남을 통일시켰던 호치민은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떤 이념도 국민의 배고픔보다 우선할 수 없다”. 호치민 광장에 새겨져 있는 이 유언 하나로 베트남은 사회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란 이렇듯 명확한 확신과 정치컨셉이 있어야 한다. 한 마디의 말이 정치의 전부라 할 수도 있다. 거짓말은 절대로 정치가 될 수 없으며 잠시 국민을 현혹할 수 있으나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일찍이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전쟁을 겪었고 독재와 싸워왔던 우리국민들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일궈낸 민주주의 국가란 말은 수정돼야 한다. 우리 국민은 오래전부터 고비 때마다 자기의지를 분명히 해왔고, 승리를 일궈냈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오래전 히말라야에 있는 은둔의 왕국 부탄엘 간 적이 있다. 도대체 이 나라의 국민이 세계 행복지수 1위인 까닭이 궁금해서였다. 나라는 가난하고, 인구는 겨우 80만 명에 불과하며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일 정도로 척박한 나라. 어떻게 이런 나라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난 수도인 팀부에 내린 순간부터 이들의 삶은 문명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느꼈다. 9만 명이 살아간다는 수도이건만 신호등 하나 없었고, 국민들의 복장은 한결같이 옛 우리의 두르마기 모양의 전통옷을 입고 있었으며, 곳곳에 종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원이 있었고, 술과 담배가 없는 나라였다. 시골로 들어가자 사정은 더욱 열악했다. 산비탈까지 이어진 천수답에선 여성들이 낫을 들고 밀 수확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20일 머무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어디에서도 다툼을 볼 수 없었고, 경쟁을 볼 수 없었으며, 불친절을 경험할 수 없었다. 웃음과 미소와 여유만이 기억될 뿐이었다. 그래서 난 묻기 시작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답은 한결같았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비로소 난 그들이 왜 행복한지를 알게 됐다. 이들에겐 내세를 맡길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윤회를 믿는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왕이 있다. 가족공동체로 외로움이 없으며, 국토의 70%가 우거진 삼림으로 자연이 아름답다. 외세의 침략 걱정을 하지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곳. 그것이 이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었다.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이런 기준이라면 우리국민은 확실히 부탄보다 불행하다고.

오늘날 정치를 바라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 국민은 행복해야 할 시간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정치를 바로잡겠다고 길거리로 나선다. 다툼이 앞서고, 경쟁이 앞선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지도자는 더욱 없다. 물론 내세를 의탁할 종교 따윈 있을 수가 없다. 어떻게 스스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우리 국민은 안심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봄이 온다. 올 봄은 조금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꽃잎의 개수를 헤아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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