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한서  MBC Producer
손한서 MBC Producer

134일, 스무 번의 주말. 16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한, 아니 우리가 함께 만든 촛불 집회.

그리고 지난 10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쓴 순간, 우리는 모두 특별한 감정을 선물 받은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재의 이유가 거대한 권력과 자본의 톱니바퀴를 굴리기 위한 나사 따위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주인공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2017년 1월 1일 해를 넘기는 방송을 하면서, ‘올해는 왜 이리 시작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날도 촛불집회 누적참여자가 1000만명을 넘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날은 점점 추워지고 상황은 불투명한 것 투성이었다. 우리는 어느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걱정과 분노만이 진행형이었던 거다.

난 하루하루의 방송을 채워가는데만 신경 썼고, 스스로 신념을 지키고 있다는 소극적인 생각으로만 살아왔기에, 그 부끄러움이 새로운 해를 맞기 힘들게 했다. 반년 동안 스튜디오가 아닌 거리에 나와 있을 때만해도 나와 내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요즘의 난 광화문 광장에 가끔 나가는 것만으로 내 자신을 위안했다. 그랬던 나에게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스스로 위축되지 말자는 어떤 심리적인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언론이라 불리고 있는 조직들도 다시 존재의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본연의 사명을 기억해 낸 거다.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의 보도를 통해, 와치독의 역할을 하는 언론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스스로 랩독이나 가드독을 자처하는 언론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며, 시민들에게 참 언론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르지만 이 작은 시작이 대한민국의 언론사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이념을 넘어 헌법수호의 의지를 밝힌 헌법재판소는 수많은 명언과 명문을 남기며 그 존재의 이유를 증명했고,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박영수 특검은 국민들의 진정한 응원을 받으며 그 가치를 증명했다.

꼭 이런 거대한 민주주의나 언론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조직도 그렇고 개인도 그러하다. 우리가 만든 조그만 날갯짓이 큰 바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으니까.

조그마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피디는 제대로 된 기획과 연출을 해야만, 작가는 옳은 글을 써야만, DJ 역시 청취자에게 함께 해야 할 가치를 증명해야지만 존재할 수 있다. 그 존재의 가치는 나만 잘 살기 위해 권력에 아첨 할 때가 아니라, 우리 모두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할 때 드러난다는 걸 다시 느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어찌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슬픔만 있었지만, 이젠 나부터 부끄러움보다는 제대로 된 존재의 가치를 찾기 위한 자신감을 가져보려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된 2017년의 지금은,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올해의 첫 시작과는 많이 다르다.

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우리 모두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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