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Rove' 편집장
김선미 'Rove' 편집장

지난 12월은 무척이나 바빴다.

원래 하던 마감에, 후배가 출산휴가를 가면서 도맡게 된 새로운 책 두 권을 추가로 마감하고, 몇몇 창작자들과 함께 새로 작업하는 온라인 미디어에 컨텐츠를 채워넣었다. 새로 일을 맡기고 싶다는 전화가 오면 바로 미팅을 나갈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하고 이메일로 기획서를 보내주었다. 그 와중에 장강명 작가가 기획한 ‘한국 소설이 좋아서’라는 이북 서평집에 필자 중 한 명으로도 참여했다.

사생활도 바빴다. 9개월 된 아기 - 그러니까 거의 하루 종일을 기어 다니며 사방팔방 집안을 헤집고, 뭐든 짚고 서서 손에 닿는 건 다 입에 갖다 대고 보는 에너자이저 – 를 쫓아다니고 장 봐다 이유식을 만들고 간식을 먹이고 젖병을 소독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목욕시키고 중간중간 밥을 해먹었다. 저녁 6시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라디오를 들었고 8시에는 뉴스를 봤다.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행복했고, 뉴스를 보는 동안은 내내 분노했다.

밤 10시부터는 일을 했다. 이따금 아기를 재우다 나도 잠들 때는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썼다. 아기가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면 피곤해질까 두려웠다. 피곤해선 곤란하다. 아파서는 더더욱 안 되며, 마감은 전보다 더 철저히 해야 한다. 오타를 보고 ‘아, 이 에디터가 잠시 한 눈 판 사이 9개월 아기가 노트북 위에 토를 했구나’ 하고 알아서 이해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애 엄마는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았고 재택 근무는 꿀인 줄 알았는데, 나는 하루 두 끼를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정말 바쁘니 바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루 하루 해야 할 일들을 무사히 해내는 것에 안도했다. 아기는 아침 6시면 자명종처럼 정확하게 새벽의 정적을 깼다. 나는 하루 네다섯 시간, 꿈도 없는 잠을 잤다.

그렇게 새해를 맞았다. 매년 이 맘 때면 노트를 펼쳐놓고 작년에 다 하지 못한 일을 체크하고(자책하고) 올해 새로 해야 할 일을 잔뜩 써놓고 의지를 다지는(자책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번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 1월인지 3월인지 11월인지 별 느낌도 없다. 리프레시 없이 이대로 괜찮은가, 싶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한다는 계획이야 늘 같다. 운동을 시작하고 악기를 장만하고 외국어를 공부한다, 전보다 더 열심히 산다, 글을 더 많이 쓴다, 늘 비슷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운동을 잘 안 하고 악기를 장만만 했지 연주하지 못하며, 외국어는 거의 10년째 비슷한 수준이다.

더 열심히 산다는 추상적인 말의 정확한 뜻도 잘 모르겠다. 왜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인지도 헷갈린다. 일에 어느 정도 기본이 쌓이면 게으르게 하라고 해도 게으른 게 힘들고, 대충 하라고 해도 대충이 안 된다. 그러므로 이제 스스로에게 더 열심히, 더 많이, 더 잘, 이런 압력은 자제하고 싶다.

예전에 김어준 총수가 강연한 동영상을 본 적 있는데 그가 한 수많은 말 중 이 말만 기억이 난다.

“인간이 열심히 계획하는 모습을 신이 본다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계획을 한다는 건, 그것들을 다 이루어야 옳다는 전제가 깔린다. 동시에,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뭔가 잘못한 것이라는 결론도 생긴다. 그러므로 나는 계획하지 않겠다. 바쁜 하루 하루가 알려준 진실,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은 대가다.

대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바로 실행할 뿐이다.

며칠 전에는 출산 전부터 꼭 하고 싶던 요가를 끊었다. 사고 싶던 신발을 샀다. 만나고 싶은 친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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