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방송작가
이용규/방송작가

새해 아침 산에 오른다. 밑을 내려다 본다. 산은 산으로 이어지고, 물길은 또 제 몫들을 모아 품을 넓힌 다음 바다로 흘러든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발문이 문득 떠오른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이라 했던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이 단순한 진리조차 지켜지지 않았던 작년이었고 과거였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권리를 도둑맞았다. 국정 농단이었고, 국민은 모욕당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이어 요즘은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가 보다. 모골이 송연할 일이다. 군사독재 시절이나 있었던 음모가 부활한 것 같아 섬뜩하다. 죽었다고, 이 땅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음습하고 서슬 퍼런 창고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와 우리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난 최소한 최대공약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방송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부조리한 정책을 보고, 편협된 권력을 보고, 잘못된 정책을 보고, 그릇된 판단을 보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것인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는가.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명단에 끼워 넣었는가. 이해할 수 없는 권력이다.

세월호의 바다에 가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날 이 나라가 함께 침몰했다는 것을. 현지 어부들에게 난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들었다. 세월호가 잠기던 그 순간, 200여 척의 작은 어선들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세월호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세월호 위에서 거대한 헬기 두 대가 일으키는 바람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해경이 막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큰 배를 가졌던 20대의 한 청년은 아이들에게 접근했고 20명 넘은 아이들을 구했다고, 그 후, 그 청년은 날마다 구하지 못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며 결국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그냥 내버려 뒀으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라고...

이 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이 땅의 국민들은 그렇게 무르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나라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몇몇 사람에 의해 농단되고, 무장 해제되는 그런 사안이 아니다. 더러 ‘한국은 아직 멀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역사가 너무 짧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 못 아는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책으로만 공부한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처럼 뼈아프게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민족이 얼마나 있는지를. 4.19가 그랬고, 부마항쟁이 그랬고, 5.18이 그랬다. 6.29가 권력자들의 선의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피눈물의 대가였다. 오늘날의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들의 촛불시위가 그저 철없는 밤불 시위로 보이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도도한 행진이다.

난 <한국기행>이란 프로그램을 3년 넘게 했다. 이 땅 곳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래서 얻은 게 있다. 이 땅의 무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은 하루아침에 제 길을 찾은 것이 아니다. 오솔길은 절대로 마늘밭 하나 함부로 건너지 않는다. 고산자 김정호의 말처럼 산은 강을 함부로 건너지 않는다.

올해는 큰 선거가 있는 있을 예정이다. 또 다시 비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것이고, 그에 걸 맞는 준비를 해야 한다. 유권자는 그저 투표함에 다가가 표 한 장 던지고 오는 사람이 아니다. 표 한 장의 무게는 개인의 무게이기도 하지만 이 땅의 무게고, 역사의 무게고, 미래의 무게다. 세월호에 희생된 아이를 생각해보라. 어떻게 한 아이의 죽음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 아이에게 있어서 죽음은 우주의 죽음이다.

또다시 산에 오른다. 길을 낙엽들로 무성하지만 나무들은 벌써 싹이 틀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이치란 오묘하다. 낙엽은 절대로 그저 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내년에 돋아날 새순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떠난다. 안개는 그저 떠나지 않는다. 물방울 하나라도 나무에 던져놓고 떠난다.

비로소 정상이다. 개성의 송악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다. 돌아보면 서울의 북한산이 지척이다. 그 서울로부터 굽이굽이 흘러 온 한강이 북녘 개성 벌판을 건너와 임진강과 만나 바다로 흘러든다. 자연에는 분단이 없다.

虎千里魚萬里라 했다. 호랑이는 하루 천리를 달리지만 물고기는 하루 만 리를 떠돈다고 했다. 그저 평온한 바다 같지만 바다 속은 그만큼 빨리 움직인다는 뜻이다. 민심도 바다와 같다는 걸 제발 권력자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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