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rove 편집장
김선미 rove 편집장

나는 귀가 상당히 예민한 편이어서 작년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누군가의 구두 굽 갈 시기를 귀로 알았다. 그런 건 보지 않아도 안다. 구두 굽이 닳아서 그 안에 있던 못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저 여자는 게으르군’ 단정짓기도 했다. 남동생에게,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구두 굽이 다 닳은 채로 딱딱 소리 내며 발을 끌고 다니는 여자는 멀리하라고 편견 가득한 조언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여자들이 보풀이 잔뜩 난 스웨터를 입고 대체로 일도 대충하고 자기 관리도 엉망인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금은? 남의 발굽 소리 들어본 적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치며 지나는 사람들이 웬만하면 다 사랑스럽다.

이렇게 바뀐 건, 남들의 패션이나 매무새 같은 것이 더 이상 내 관심사도, 판단의 근거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직업이랍시고 셜록 홈즈처럼 남의 겉모습에서 많은 정보를 유추하고 이런 저런 과대망상을 펼치기도 했었는데 요즘의 나는 그런 것을 볼 여유가 없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예민했던 귀는 아기 울음 소리에 단련돼 먹먹해진 지 오래다. 청각과 함께 마음도 무뎌졌는지 구두 굽이고 보풀이고 뭐 그리 대순가 싶다. 외모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차림은 수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그 시각적인 싸인들에 가려진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믿는 쪽으로 가고 있다.

돌도 되지 않은 영아를 키울 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왜 우는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대체로 배고프거나 졸릴 때 울지만, 낮잠에서 방금 일어나 배부르게 밥을 먹은 뒤에도 운다면 정말 궁금해진다. 대체 왜 우는 걸까. 말해주면 너무나 편할 텐데, 인간이 말을 못하는 기간은 대체 왜 이리 긴 걸까. 언제까지 나 혼자 ‘이래서 그래? 저래서 그래? 아님 이렇게 할까? 대체 왜 그러는데?’ 대답 없는 질문을 수 없이 반복해야 하는 건지. 답답하고 짜증나고 한 편으론 측은하다. 왜 신은 아기를 말 못하는 존재로 만드셨을까.

그리고 아이를 낳은 지 8개월쯤 됐을 무렵, 나는 알았다. 어릴 때 책에서 읽었던 이유 – 아기는 하늘의 비밀과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신이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 바로 부모와 아기가 서로를 마주보고 더 많은 시간을 갖고, 그리하여 이면을 헤아리게 함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겪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희로애락을 나누게 함이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의 새 경험을 통해 알게 함이고,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성장하게 함이다. 알고 보니 아이는 나를 약 올리려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게 아니라 중력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아이는 안 자려고 우는 게 아니라 지금은 소화가 안 됐으니 좀 있다 눕혀달라고 하소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왜 그래’보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를 더 자주 말한다.

예전의 나는, 몇 초 만에 얻은 정보를 토대로 사람을 쉽게 쉽게 분류했을 지 모른다. 그것이 내 직업에 걸맞은 눈치라 믿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갈아야지, 갈아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구두방 찾을 시간이 안 나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낡은 구두를 꺼내 거슬리는 소리를 참아가며 돌아다니고 있는 누구에게, 참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구태여 끄집어낸 거슬리는 존재 또한 나였을 지 모른다.

아이는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말 못하는 아이에게서 훨씬 더 많은 말들을 배워나간다. 신은 그러라고, 몸만 커가는 어른들을 상상 이상의 고생이 존재하는 육아의 세계로 안내한다. 서로를 더 헤아리라고. 어떤 사정들에 대해 마음대로 재단하고 단정짓지 말라고.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