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대중에게 던진 말은 아닐지라도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고 한 플라톤의 메시지가 뼈저리게 다가온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 21세기 민주국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최순실’ 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국가의 리더십이 허망하게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분노만큼이나 커지는 상실감에 허탈해하고 있다. 참담한 뉴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 외신에선 미국 대선레이스 만큼이나 일명 ‘저주시리즈’로 불리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가 화제다. 그 중심에 시카고 컵스 사장, ‘저주 격파자’(curse buster)로 불리는 테오 엡스타인이 있다.

○…테오 엡스타인(42세)은 197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991년 예일대에 입학, 정치학·심리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홍보팀에 취업했다. 재직 중 로스쿨에 다니며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아이비리그 출신의 변호사’라는 멋진 타이틀을 얻었다.

‘밤비노(베이브 루스의 별칭)의 저주’에 시달리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존 헨리 구단주는 2002년 말 머니볼의 창시자인 오클랜드의 빌리 빈 단장을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차선으로 엡스타인을 스카우트했다. 그의 나이 28세, MLB 역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고비용 저효율의 부자구단이던 보스턴은 테오의 손을 거치면서 저비용 고효율 구단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누적된 기록들을 바탕으로 선수의 기량을 평가하는 통계기법, 즉 ‘세이버메트릭스’를 빌리 빈 만큼이나 과감하게 도입했다. 타율(AVG), 평균자책점(ERA) 등 클래식 스탯보다는 OPS(출루율+장타율),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WAR(대체선수 승리기여도) 등 세이버 스탯을 활용해 라인업을 꾸렸고 팀은 몰라보게 끈끈해졌다. 레드삭스는 그가 전권을 쥔 이듬해인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뉴욕 양키스를 맞아 역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3패 뒤 4연승)을 달성했고, 여세를 몰아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저주에서 해제되고 테오의 리더십이 더욱 정교해진 2007년, 보스턴은 또 한번 챔피언에 오른다. 부임 5년 만에 두 번의 우승을 실현한 그는 보스턴의 영웅이자, MLB의 신성이었다.

○…2011년 10월, 보스턴 팬들에겐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전해진다. 테오가 시카고 컵스의 사장에 취임한 것. 10월 23일, 유력지 ‘보스턴 글로브’에는 ‘10 Years/Two Championships/Countless Memories/Infinite Thanks’라는 제목의 광고가 실린다. 테오는 자비를 들인 신문광고를 통해 그만의 방식으로 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모두가 박수를 칠 때 과감히 보스턴을 떠났다. 대신 시카고를 선택했다. 시카고 컵스의 마지막 우승은 1908년, 심지어 1945년 이후 월드시리즈에 진출조차 못했다. 까마득한 1908년은 조선 순종 2년으로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해이자, 일제가 우리의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해다. 1세기 넘게 염소의 저주, 3B(빌리, 바트만, 블랙캣)의 저주 등 지긋지긋한 패배주의로 얼룩진 팀이 바로 시카고 컵스였다. 보스턴에서 쌓은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테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야 수비를 강화하고 세이버 스탯에 기초한 선수영입, 강력한 팜을 통한 유망주 육성 등을 착착 실행해갔다. 만년 하위권을 맴돌던 컵스는 보스턴이 그랬던 것처럼 2012년부터 새로운 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올해, 마침내 시카고 리글리필드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며 염소의 저주는 71년 만에 깨졌다. 나아가 컵스 팬들이 108년 동안이나 염원하던 우승도 실현됐다.

○…이쯤되면 테오 엡스타인에게 저주 ‘버스터’나 ‘엑소시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MLB에서 가장 악명이 높던 밤비노의 저주와 염소의 저주가 모두 그의 손에서 풀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 말대로 ‘우주의 기운’이 가득한 행운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시카고 사람들은 야구를 위해 태어나고, 보스턴 사람들은 레드삭스를 위해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극성스런 두 도시에서 그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성공 신화를 썼다. 스포츠전문채널 ESPN은 지난 9월, 메이저리그 올해의 경영인으로 그를 선정했다. 전혀 놀랍지 않은 결과였다. 야구단은 하나의 거대기업이다. 지난 3월, 경제지 포브스가 매긴 시카고 컵스의 구단가치는 22억 달러. 30개 구단이 매년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MLB에서 테오 엡스타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이비종교에서나 나올 법한 ‘우주의 기운’ 따위가 아니라 ▲공정하고 투명한 의사결정 ▲두려움 없는 혁신 ▲통계와 현실 사이의 적정한 밸런스 ▲유망주 육성과 과감한 기용 ▲FA 영입 등 적재적소에 이뤄지는 투자 ▲객관적 분석과 냉철한 운용 등으로 요약된다. 경영자로서 그의 리더십과 앞으로도 이어질 커리어는 쇠락과 번영, 지속가능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기업의 CEO와 리더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준다. 오랜 기간, 징크스와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팀을 리그 최강의 구단으로 변모시킨 그의 열정과 리더십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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