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rove 편집장
김선미 rove 편집장

세계적인 IT 기업들은 AI 알고리즘을 대중에 공개한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알파고 역시 오픈 소스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에 알파고를 다운로드한다고 해도 이세돌을 이길 수는 없다. 승리의 열쇠는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글이 공개하지 않은 것, 바로 무수히 축적된 데이터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승패를 좌우하고 퀄리티를 높이고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데이터다.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무수한 노력과 시간이다. 좀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이치다. 뭐든 익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앞당기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내 친정어머니는 토마토 농장을 운영하는데 토마토를 일찍 따서 억지로 익히는 일은 절대로 없다. 시간이 좀 걸리고 돈을 좀 덜 벌어도 토마토가 가지에서 충분히 숙성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게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 ‘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황선미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 역시 ‘아무리 글쓰기 노하우를 가르쳐준다 해도 반드시 동굴에 들어가 일정 시간 이상을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딪히고 깨지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깨닫고 수정하는 경험과 시간이 반드시 일정량 필요하다. 이것 없이 저절로 어느 반열에 올라선 작가는 없다. 첫 작품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한들, 축적이 없는 그는 곧 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걸 창작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도 ‘링으로 어서오세요’라며 누구나 문학계라는 링에 올라 소설을 쓸 수 있지만 링에서 얼마나 버틸 지는 결국 습작의 시간이 말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말 힘들지만 그렇게 숙성에 필요한 시간의 축적을 거쳐야 무언가가 완성된다. 이 삶의 진실이 버거워도, 앞서 말했듯 누구나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딜 만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았던가, 회의를 느낀다. 피로하고 분노한다. 모이기만 하면 희망과 즐거움을 이야기했던 사람들과도 부쩍 웃을 일이 줄었다. 사회에 나간 뒤로 쭉 열심히 살고 있는, 그래서 자신의 직업군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친구 몇을 만나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말 대충해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일일이 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걸까.’

‘첫 단추, 가운데 단추, 끝 단추 끼면 대충 여며질 줄 알았는데 우리가 가진 옷은 수천 개의 단추를 하나하나 다 잠가야 겨우 따뜻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중간에 두어 개 정도 건너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서, 하나하나 손을 대서 여미고 풀어가며, 떨어지면 다시 꿰매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지나 우리는 여기에 왔다. 그런데 누군가는, 누군가만, 아무 이유 없이 이 과정을 건너뛴다. 우리가 손끝이 아프도록 단추를 여밀 동안 어떤 무리들은 이 축적의 시간을 비웃으며 우리에게서 훔쳐간 돈으로 지퍼를 사서 옷에 달았다. 그리고 참으로 쉽게 삶의 진실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부작용을, 전 국민이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한다.

우리들은 실하게 열린 토마토 앞에서 배를 곪으며 기다렸고, 동굴 안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과 싸웠고, 링 위에서 얻어 터지더라도 자존심을 걸고 버텼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단추를 정성스럽게 여며가며 추위를 견뎠다. 그 보상으로 겨우겨우 지금의 삶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겐 그 삶이 전부다. 그러므로 자연의 섭리가, 사회의 질서가, 삶의 진실이 반드시 회복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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