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한서  MBC Producer
손한서 MBC Producer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을 때마다 여전히 힘들지만, 지금은 연차가 제법 쌓여서 이런저런 스타일로 연출하는 것에 나름 익숙해지기는 했다.

잘 만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데 ‘내가 과연 연출이란 걸 할 수 있을까?’ 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조연출을 하던 시기였는데, 그 땐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기 힘들었다. 피디란 직업자체가 학교에서 공부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도제식 시스템을 따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연출을 그냥 선배의 어깨 너머로 알아서 배우다 보니, 조연출을 시작할 때는 참으로 무지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라보는 선배들의 연출은 정말로 대단하다. 따라갈 수 없는 기획력을 발휘하고, 스태프들과 함께할 땐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지며, 그의 한마디가 조연출에게 가지는 무게는 법과도 같다.

무엇하나 더 잘 할 수 없던 조연출 시절은 내게 많은 고민을 던져 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느낌을 받았을 때다. 조연출은 피디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고, 기술감독도 아니며, 출연자도 아닌, 뭔가 엄청나게 바쁘게 일을 하며 돌아다니지만, 프로그램에서 언제 없어져도 티가 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큰 역할이 없는 거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잘 챙겨주더라도 내가 속해있는 곳은 내 집이 아닌 것 같다. 추억할만한 사진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뭘 하는라 정신이 없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 시절, 조연출에서 연출이 된다고 해결 될 것 같지 않던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아이디어가 기발한 선배처럼, 선곡이 기가 막힌 선배처럼, 연예인을 섭외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배처럼,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연출을 하는 선배들은 이미 모두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무리 달려가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은 단지 느낌이 아니라 내겐 현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연출을 시작하게 됐을 때 실제로 내가 서있을 자리는 없었고,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많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선배들은 ‘넌 너만의 색깔을 가지고 잘 연출할거야’, ‘원래 피디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시작하는 후배에게 그냥 힘을 주기 위한 말이었을 거다.

그 때, 선배들의 조언에 힘을 내서 생각한 나만의 해결책은 이런 거였다.

‘절대로 대단한 피디 선배들처럼 연출하지 말자!’

내가 더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훌륭한 선배들보다 못하기에, 선배들이 애써 하지 않았던 것을 조금씩 해봐야한다, 그것이 하찮고 별로라서, 아님 황당해서 실행하지 않았던 것들을 실패하더라도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선배들의 말대로 피디로서 나만의 색깔을 점점 가지게 됐다.

그 때 보았던 선배들은 여전히 대단한 연출을 하고 있고, 난 여전히 조언을 구하러 다니지만, 나도 어느새 하나의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피디가 됐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너만의 색깔을 가진 피디가 되라’고 조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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