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원 두산중공업 전무
김성원 두산중공업 전무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과학기술전략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우리 경제가 일본의 엔저와 중국의 기술발전에 끼인 ‘신 넛크랙커’ 상황에 처해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두산중공업과 같이 대형 제조업을 영위하면서 해외 사업 비중이 높은 우리 기업들에게는 매일 겪는 실감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기술력이 요구되는 발전 EPC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은 중국보다 한 수 위의 기술을 바탕으로 중동, 동남아 등지에서 매년 막대한 금액의 수주를 통해 국내 경제발전에 기여해 왔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낮은 기술수준으로 인해 사우디, UAE와 같은 중동의 부자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한국의 기자재와 기술을 더 선호했고, 중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서남아 등 빈곤국가나 아니면 다량의 차관을 동원하여 돈을 주고 프로젝트를 사는 형편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최근 저유가로 인해 재정적 곤란을 겪는 중동 산유국들이 대형 발전프로젝트를 IPP 형태로 발주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IPP를 준비중인 발전Developer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기자재를 선택하는 사례가 하나 둘씩 나오더니, 금년에는 아예 한국산 기자재와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중국의 위협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히 중국을 경쟁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벽을 치고 있었던 우리의 인식을 한 번 바꿔 보자는 얘기를 하고싶다. 우리가 회피한다고 해서 중국 기업들이 해외 인프라 시장에 진출하지 않을 리 만무하고, ‘일대일로’ 정책을 기반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라는 막강한 우군까지 생긴 마당에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은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된 상황에서 중국과 같이 사는 방법을 한 번 찾아보자는 것이다.

작년 9월 북경에서 개최된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양국 기업들의 제3국 공동진출 협력방안이 심도있게 논의되었다. 한국의 기획재정부와 중국의 발전개혁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양국 기업들이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보완적 협력관계를 통해 제3국 진출을 모색하고자 하는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정부가 마련해 준 장에서 두산중공업은 인도네시아, 태국, 파키스탄과 같이 가격 경쟁이 치열한 지역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중국의 EPC 업체들과 연쇄적인 미팅을 가졌다. 처음엔 중국 업체들과 협력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더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괜히 우리가 가진 정보만 노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부의 비판적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는 역시 달랐다. 중국 EPC 업체들도 우리를 간절히 원하는 부분이 무척 많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중국 기업들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드리워진 저가, 싸구려 기술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더 많은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한국의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품질 좋은 기자재를 적극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중국 기업들이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일반 토목, 건설 분야를 담당하고 보일러, 터빈과 같이 기술이 요구되는 기자재는 한국 기업이 제공하여 발주처의 까다로운 기술 검증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가격 경쟁력을 제고해 보자는 것이 협력의 골자인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중앙아시아와 같이 중국이 잘 아는 지역은 중국이 리드를 하고, 중동, 베트남과 같이 한국이 우세한 지역은 한국이 리드하여 지역별로 세분화 된 전략을 가지고 공동 진출하자는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AIIB를 통한 자금 지원으로 인해 실크로드상의 중앙 아시아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진출은 앞으로 엄청나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이 지역에 대한 이해는 낮고 잠재된 리스크를 다 회피하면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란 무척 어렵다. 이런 지역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훌륭한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 기업의 제3국 공동진출 협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조만간 해외 프로젝트에서 양국 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일본, 구미 선진국 기업들과 경쟁에 나서는 모습도 왕왕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어차피, 중국과의 가격 경쟁으로 한국 기업이 수주하기 힘든 지역의 프로젝트는 적과의 동침을 통해 일부라도 수주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는 길이다.

마침, 오는 26일 서울에서 양국 정부 주재로 ‘한중 기술경제교류회의’가 개최된다. 그 행사에서는 양국 기업들의 공동협력 사례가 발표될 것이고, 제3국 공동진출을 위한 정부간의 지원방안도 더 활발히 논의될 전망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피할 수 없는 경쟁자라면 아예 처음부터 친구로 만들어 같이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우리 기업들의 발상의 전환을 이번 기회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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