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체 중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곳도 있고요, 아마 계량기만 전문으로 하는 곳들은 재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 많을 겁니다.”

요즘 전력량계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힘들다는 말이 인사처럼 가장 먼저 나온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전 산업이 어려운 시기라고 하지만 전력량계 업계의 어려움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계량기만을 주업종으로 하는 기업 중에는 회생절차를 밟거나 폐업 직전에 놓인 곳도 있는 등 사정이 더욱 열악하다.

전력량계 시장은 개폐기나 변압기 등 다른 중전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다. 이런 상황에서 나주혁신산단 내 기업에 공공기관 우선구매 대상 자격이 부여되다보니 이 물량을 노린(?) 이종 업체들의 전력량계 시장진입이 가속화됐다.

그 결과 2017년 25개였던 계량기 업체는 현재 43개까지 늘었다. 업체가 늘어나는 것은 생존전략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문제는 우후죽순 늘어난 기업들로 인해 전력량계 시장의 가격 하락과 저품질 우려가 동시에 커졌다는 점이다.

현재 한전 계량기 시장의 입찰방식은 최저가다.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금력이 있는 기업들은 계량기를 더 낮은 단가로 이른바 ‘후려치기’한 뒤 값싼 중국 부품을 들여와 시장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그나마 업체들은 내년에 보안계기가 들어오게 되면 기술적 차이로 경쟁이 조금은 완화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걸고 있지만, AMI 사업이 늦어지면서 이 또한 업체들이 준비를 서두르고 있어 생존경쟁은 치열해질 전망이다.

제3자 입장에서 업계가 망가뜨리고 있는 생태계를 왜 우려해야 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계량기는 아파트, 주택, 빌딩 등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건물에 적용되는 필수 기자재다. 그리고 그 절반 이상의 규모를 관리하는 곳이 바로 한전이다.

지금과 같은 업계 상황이 이어진다면 품질 저하는 물론이고 산업 주도권이 중국에 치우칠 수도 있다. 지난해 국정조사에서 AMI계량기 64만대가 리콜된 사실이 드러난 것만 봐도 품질저하 문제는 우리 현실 앞에 닥친 문제다.

이는 국가적으로나 소비자에게도 좋지 못한 결과다. 불량 계량기는 향후 계시별 요금제, AMI 보급 등 각종 사업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 피해는 전기료를 내는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손 놓고 ‘업체 간 싸움이니 업체 끼리 해결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전의 공공사업이 연결된 만큼 진입장벽을 높이든지, 제도를 개선하든지, 그도 안 되면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는 지원책이나 불량 부품에 대한 패널티라도 강력하게 부여해서 시장 생태계를 회생시킬 의무가 한전과 정부 모두에 있다.

물론 전력량계 업체들이 최일선에서 건전한 시장생태계 조성과 품질 좋은 제품공급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