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당장 6월을 기점으로 산업계의 지형이 크게 바뀔 것이라는 게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먼저 태양광 발전소에 설치된 ESS의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 5배수 정책이 종료되고, 단계적 축소가 계획대로 시작될 예정이다. 이어 6월 말에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연이은 화재 사건으로 침체된 ESS 시장 활성화를 위한 진흥대책을 내놓을 계획이어서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업계는 6월을 기점으로 정부의 정책이 피크저감 목적의 ESS를 중심에 두고 재구축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업계 관계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정책의 추이를 살폈을 때 대부분이 피크저감용 ESS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를 통해 ESS 활성화를 통한 국가적 편익을 높이는 데 보다 집중할 것으로 업계는 관측했다.

◆ESS 목적 맞는 지원정책 마련될까=정부 사정에 정통한 업계 한 관계자에 따르면 6월 4배수로 변경되는 태양광 연계 ESS의 REC 5배수 가중치 제도는 업계의 연장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계획대로 진행될 전망이다.

업계는 그동안 태양광 연계형 ESS의 REC 가중치가 조정될 경우 신규 설비의 수익성이 사실상 적자까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만큼 지속적인 지원을 이어줄 것을 요청했다. REC 가격의 폭락 등으로 인해 기대수익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중치 축소까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사실상 시장이 사장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최근 한국미래기술교육연구원이 개최한 ESS 관련 세미나에서 한 참가자는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아직까지는 의무화, 보조금 등 제도 덕분에 ESS 시장이 형성되는 게 현실”이라며 “한국에서도 재생에너지 연계형 ESS에 REC 가중치를 제공하는 등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시장의 성장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REC 가격 하락이 ESS 수익성을 악화시킨 만큼 아직까지는 5배 가중치를 지속 적용할 필요가 있다”며 “태양광 연계형 ESS의 가중치 하락을 강행할 경우 사실상 중소규모 사업자는 전부 무너지고 대기업만 남는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업계의 주장에도 정부는 가중치 축소를 계획대로 이어간다는 입장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모양새다. 이미 5배수 종료 기한을 6개월 연기한 바 있을뿐더러 태양광 연계용 ESS가 재생에너지의 특징인 간헐성 문제를 해소하기보다는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용도로 변질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태양광 연계형 ESS가 사실상 현실성이 떨어지는 제도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재생에너지 정책 분야의 한 전문가는 “애초에 태양광 연계형 ESS의 정책 설계가 잘못됐다. ESS는 기본적으로 경부하 시간대인 밤에 저장하고, 피크가 걸려 요금이 가장 비싼 낮에 방전하게끔 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태양광과 애초에 연관성이 적은 제도”라며 “오히려 REC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가중치 5.0을 부여하다 보니 업계가 더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6월 말 발표할 계획인 ESS 진흥대책에서는 피크감축용도의 ESS를 대상으로 진행 중인 특례요금제 연장 등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ESS 산업계를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를 보다 분명히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같은 방침은 정부가 국가적 측면에서 피크감축용 ESS의 편익이 재생에너지 연계형 대비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전 경영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5년간 용도별 ESS의 경제성을 분석한 결과 ESS 사업자에 지급한 보조금 대비 편익이 피크감축용은 1.57 수준으로 높았고, 재생에너지 연계형은 0.05 정도로 크게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해당 보고서는 2018년 기준 국내 ESS 누적 설비용량 1605MW를 대상으로 15년 간 보조금을 지급했을 때 발생하는 편익에 대해 연구한 결과다.

재생에너지 연계형(571MW)에는 15년간 1조7315억원의 보조금이 투입되지만 실질적인 편익은 850억원에 불과해 B/C가 0.05에 그쳤다. 반면 피크감축용(642MW) 설비에는 4142억원을 투자해 6497억원 정도의 편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 376MW 정도가 설치된 주파수 조정용도 3405억원의 보조금을 투입, 3705억원의 편익이 발생해 1.09 정도의 B/C를 보이고 있었다.

한전 경영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재생에너지 연계형 ESS는 REC 가중치가 없으면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보조금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불필요한 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건전한 ESS 시장 이끌어가려면 장기적 관점에서 지원해야=업계는 ESS 시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제도 손질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행 ESS 지원제도들이 대부분 단기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정책인 만큼 보다 장기적인 관점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특히 이 같은 제도들이 최근 발생하는 ESS 화재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정부가 지난 2월 발표한 ESS 안전대책은 배터리 충전율(SOC)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 신규설비를 대상으로 옥외설비의 경우 SOC 90%, 옥내설비는 80%를 지키게끔 규제를 거는 것.

실제로 과거 스마트그리드 보급사업의 경우 ESS 스펙에 충전율 90%를 명시해놓은 결과 한 차례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업계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실상 SOC 규제를 통해 과도한 운전을 막는 것이 ESS 안전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정부는 ESS와 관련된 지원 제도에 대부분 기한을 명시하고 있다. 태양광 연계형의 경우 당초 올해부터는 REC 가중치를 4배로 줄이기로 했고, 수요관리용 설비도 3배수 요금할인 특례가 올해까지만 적용된다.

이처럼 단기적으로 특례를 주는 지원제도 탓에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충전을 해야만 조금이라도 수익을 더 남길 수 있다는 인식이 형성됐다. 그러다보니 ESS 화재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ESS 사업자들 대부분이 95~100% 수준의 충전율로 설비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분석이다.

이 같은 제도는 시장 초기의 붐업 효과는 기대할 수 있지만 제도가 끝날 무렵에는 신규 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는 부작용도 존재한다.

이미 지원제도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신규 사업자의 진입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 시장 초기에 뛰어든 플레이어들은 큰 수익을 거뒀지만 슬슬 줄어드는 사업성 탓에 시장에 대한 흥미도 줄어들 것이라고 업계 한 관계자는 지적했다.

이와 관련 단기적으로 폭발적인 지원금을 주는 시장에서 벗어나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보조를 하는 시장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업계 일각에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정 시점에 뛰어든 사업자만 혜택을 받는 게 아니라 태양광 장기고정가격계약처럼 준공시점으로 일정 기간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지금처럼 2년여간 3배수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주는 일몰제보다 준공시점을 기준으로 15년간 1배수 할인혜택을 주는 등의 정책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제 ESS 시장도 단기적인 붐업 정책의 효과를 볼 시기는 지났다. 오히려 신규 사업자들이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제도가 필요할 시기”라며 “6월 발표될 정책에 사업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장 목소리를 담은 제대로 된 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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