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제조업 미래에 대한 전략적 방향성 모호…규제철폐·디지털 전환 필요”
김태영 “중국 질적성장이 위기 불러…규제 풀고 젊은 세대 유입시켜야”
이승석 “경제·사회변화로 수요 급감…제조업 세부담 경감·투자 지원 이뤄져야”
전봉걸 “새로운 산업 출현 없어 어려움 가중…기업 위한 사회적 환경 조성해야”

과거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한국 제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국내외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투자·생산 능력이 감소한 데 이어, 점차 공장 가동률마저 낮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체 제조업 재고율(5월)은 117.9%까지 치솟은 반면, 제조업 평균 가동률(1분기)은 71.8%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제조업의 동력이 식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제조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우리나라 산업계 전반에서 제조업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해온 민·산·학 전문가 4인에게 공통질문을 던져 길을 물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저성장·디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 경제상황과 그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는지.

박재성 중소기업연구원 본부장(이하 ‘박 본부장’): 현재 국내 경제상황은 경기변동적(cyclical fluctuations) 요인과 구조적 변화(structural change) 요인, 둘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경기변동적 측면에서 중소기업연구원은 올해 경제가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도체 업황 호전이 기대되고, 미중 무역 분쟁에 따른 충격도 지난해보다는 완화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적 변화에 따른 대응이다. 산업 전반이 이른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경제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 경제가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다. 이 점에서 아직 확실한 경제 운용의 목표나 산업 정책의 방향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김태영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이하 ‘김 연구위원’): 국내경제의 위기는 산업구조 전환 지연과 중국 제조업의 질적 성장 등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산업구조 전환의 지연으로 인해 중국 등 신흥국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며, 중국 제조업의 질적 성장은 수출중심 경제성장 체제를 지닌 우리나라의 교역규모를 감소시켜 경제성장 방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하 ‘이 연구위원’): 현재 우리 경제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경기부진의 장기화로 인한 소비심리 약화, 가계부채로 인한 원리금 상환부담 과중, 고령화 등 인구구조의 변화로 인해 수요가 전혀 물가를 견인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관련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12월 경제동향’에 따르면 최근 일부 심리지표가 개선됐으나, 수출과 투자가 위축되는 등 실물 경기는 부진을 지속하고 있다. 2019년 4월부터 시작한 ‘부진’ 평가가 12월까지 9개월간 이어진 것이다.

한편 저금리로 인해 시중유동성은 1000조원 이상 누적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볼 때, 디플레이션 및 유동성 함정이 현실화 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세계은행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말 우리나라의 명목 GDP 대비 광의통화(M2) 비율은 151.5%에 달했다. 이를 감안하면 늘어난 유동성만큼 민간의 경제활동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전봉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이하 ‘전 교수’): 우리나라의 경우 여타 주요 선진국에 비해 무역의존도(수출입/GDP)가 상대적으로 높은 국가다. 따라서 세계 경제, 특히 주요 무역대상국인 중국, 미국, EU 등의 경제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미·중 무역분쟁이 지속되고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추진 등으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 등 대외 여건이 긍정적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울러 국내 경제도 15~64세의 주력 생산인구가 감소하는 등 공급측면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출둔화 등으로 투자와 고용이 확대되지 못해 수요측면에서도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산업계 여러 부문 가운데서도 제조업이 특히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조업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박 본부장: 제조업의 위기는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대응이 지체되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제조업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세계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 것인지, 이를 위해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이 같은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겉으로는 아직도 규모가 크고, 매출도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이 크다.

특히 제조업은 중소기업 분야에서 사업체 수 기준 전체 중소기업의 11.6%를 차지하고 있으나 매출액 기준으로는 30.7%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고용측면에서도 중소기업 종사자 수 4명 중 한 명은 제조업 종사자다. 그럼에도 제조업의 미래에 대한 전략적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층층이 수직 계열화된 중소 제조업도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 산업계 전반에 걸친 규제의 문제가 가장 크다. 최근의 핀테크, 원격 의료 등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기업의 경영 및 신산업에 대한 투자에 우호적이지 못한 현재의 산업 규제는 기업들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혁신활동을 위축시키고 산업구조 전환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반면 중국은 2010년 초반 기존의 양적 경제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제성장 기조를 전환한 이후 ‘중국제조 2025’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자국 제조업의 역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 제조업의 질적 성장은 수출시장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수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는 우리 기업의 중간재 수출 교역 규모를 감소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업 경영 환경의 악화는 단순히 제조업 위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자본이동이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기업 경영 여건이 우호적인 국가로 생산시설을 이전함으로써 국내의 일자리 부족 현상을 심화시키고 경제성장 동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연구위원: 과거 10년간 우리경제의 제조업은 혁신성장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제조업 위기는 외부 요인에 의해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기술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발표한 기술수준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의 소재·나노 분야 기술 수준(미국 100 기준)은 77.4에서 78.3으로 성장세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64.3에서 76.2로 개선됐다. 성장이 둔화된 일본조차도 95.6에서 98.0으로 소폭 상승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으로 고용관련 비용은 빠르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기술 및 생산비용의 경쟁력이 점진적으로 둔화되고, 정부의 정책지원 여력이 미비한 점이 제조업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전 교수: 현재 국내 제조업은 예전과 같이 높은 성장의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 여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적으로 우리 경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무역의존도가 높아 대외 수출의 어려움으로 올해 1~11월 중 자동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수출품목이 감소함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시기에는 경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출현할 필요가 있는데, 현 상황은 그렇지 못한 게 문제다. 제조업의 어려움은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기업의 전반적인 투자심리를 위축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기업하기 위한 환경이 비우호적으로 변화함으로써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대응, 수출 확대 등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다. 제조업 분야의 위기 극복을 위한 제언을 한다면.

박 본부장: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혁신성장’이 언급되지만 여전히 ‘혁신’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혁신을 얘기하려면 고도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도 규제철폐, 둘째도 규제철폐 뿐이다.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볼 수 있도록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것이 제조업 위기 극복의 근본처방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산업 환경의 급변에 대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산업을 발굴하고 기존 산업은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전환시켜 나가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추진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 전체로 ‘지능화’를 국가 아젠다로 설정, 1년, 2년, 5년, 10년의 계획이 무엇인지 제시해야 한다. 가령, 민관협력의 ‘디지털 전환 협의체’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 연구위원: 단기간 내 산업규제와 CEO에 대한 과도한 법적 책임을 완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책 결정에 관한 부문은 정부의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단기간 내에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일터 혁신 사업은 제조업이 처한 당장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는 없으나, 사업 추진방향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사업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제조업의 혁신이 발생하는 경로 중 하나는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소업체를 포함한 제조업체 전반으로 젊은 세대의 유입이 필요하다. 비록 일터 혁신 사업이 중소제조업체 근로자들의 금전적 여건을 개선해줄 수는 없으나, 젊은 세대가 중소제조업체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인 열악한 작업환경은 개선할 수 있다. 이를 시작으로 단순 자금지원이 아닌 중소업체의 구조적 변화를 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중소제조업체에 젊은 세대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정책이 수립돼야 할 것이다.

이 연구위원: 생산비용이 점차 늘어나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생산기업의 세부담을 경감하고 투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과 연관된 제조업 분야의 연구와 투자에 대한 규제를 과감히 완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해외로 나간 투자금액은 2196억달러(한화 약 24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의 해외 투자는 국내 투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다. 제조업부문 해외 직접투자 규모는 지난해 163억6000만 달러로 연평균 13.6% 증가한 반면, 제조업의 국내 설비 투자는 5.1%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 같은 이탈현상은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전 교수: 앞으로도 기업이 기업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최근 노사갈등,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논의, 최저임금 인상 등 기업에는 부담이 되는 정책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경제가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성과를 만드는 정책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기업이 존중받으며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또 4차 산업혁명 등과 같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필요한 규제를 만들어주고 기존 규제를 검토,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해야 할 것이다. 정책당국은 새로운 제품이나 산업이 출현할 때 기존의 이익집단의 입장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국가전체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고 판단함으로써 이익집단의 갈등을 조율·조정하며 서로 타협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

복잡다기화된 사회경제 구조 하에서 경제는 시장에 맡기되, 정부는 시장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보조하고 보완하는 역할로 재정립하는 것도 현 시점에 필요한 중요 과제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