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임진년 1592년의 8월도 무척 더웠을 것이다. 그 해 4월(음력) 시작된 왜란으로 의주까지 피신한 선조는 더위보다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서애 류성룡은 이 시기에 정승과 도제찰사로서 정무와 군무를 총괄했다. 이순신 장군도 권율 장군도 그의 천거로 난세에 등용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와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후손에게 경계하고자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징비록 서문에 그는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라고 징비록의 의미를 전하며 전란을 막지 못한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다. “나 같이 못난 놈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나라의 중책을 맡아 바로잡지도 못해...”라며 살아있음을 자책한다. 그러나 그였기에 자책이라도 할 수 있지, 다른 자들은 자책이라는 말조차 가당치 않았을 것이다. 서애는 기술에도 밝았다. 성벽 방어를 위한 ‘치’(성곽에 돌출한 구조물)를 설명하고 더 나은 ‘치’의 형태를 제시하기도 했다. 경주성 전투 장면에는 당시 첨단 무기였던 비격진천뢰에 대해 설명하고,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칡을 꼬아 부교를 만드는 과정 등, 징비록은 공학자 류성룡의 일면도 보여준다.

극일의 열기가 뜨겁다. 8월의 뉴스는 온통 한일 관계이다. 상대의 급소가 어디인지, 상대를 제압할 명분이 무엇일지, 극일의 기치는 8월의 더운 바람을 무색케 한다. 전자제품 왕국인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가전시장과 반도체를 석권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성장은 실로 눈부시다. 전략물자 통제를 꺼내든 일본도 내심 한국의 전자산업에 대한 경외감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일본이 부러워하는 또 하나의 산업이 있다. 바로 원자력이다.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집념은 상상 이상이다. 우리보다 12년 앞서 1966년에 상업운전을 시작했고, 후쿠시마 사고 전에는 미국, 프랑스에 이어 54기를 보유했다. 원자력연구도 끈질기게 하고 있다. 연구로도 우리는 하나뿐인데 일본은 경수로형, 소듐냉각고속로형, 가스냉각로형 등 다양한 연구로를 가지고 있다. 일본 화학연구소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이미 우라늄 농축 연구를 했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은 비핵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사용후연료를 재처리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고속로 연구도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와 손잡고 있다. 원전 산업체로 비등수로는 히타치가 GE와 합작으로, 가압경수로는 웨스팅하우스 기술을 바탕으로 미쓰비시가 제작사로 있다. 그런데 우리보다 여러 원자력 분야에서 앞선 일본이지만 우리가 APR1400이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낸 반면에 일본은 자기 브랜드라고 내세울만한 원전이 없다. 영국, 베트남, 터키에 원전 수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한 사례도 없다. 그러니 우리나라 원자력산업에 대한 질시가 어느 구석엔가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로 지금은 고작 9기의 원전만 가동 중이다. 일본 내부에서의 반핵여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당해보았기에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서 일까. 일본의 원자력 포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먼지를 털고 징비록을 다시 본다. 두려움에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는 선조, 그 앞에 우왕좌왕하는 신하들, 분명 떨리는 붓을 참고 썼을 부자와 부부가 서로를 먹었다는 처참한 민초의 모습이 보인다. 서애는 충무공은 물론 김천일, 고경명, 곽재우 등 수많은 의병의 활약과 2천년전 유대인의 마사다 항전에 비견할 진주성 전투의 치열하고도 처연한 영웅담을 후세에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징비록에는 그의 회한도 서려있다. 국력이 없어 명군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춰야 했던 초라함, 왜구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한 미욱함, 그들의 신무기인 조총에 당했던 무력함, 용기는 있으나 지략이 없고 훈련도 못받아 전장에서 사그라지는 병사들에 대한 애절함... 극일을 외치는 오늘, 그에게 탈원전을 묻는다. “우리는 버리고 상대는 지키는데 이기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국격의 기술을 버리고 극일을 말할 수 없으니, 국력으로 키워온 원자력을 지키지 못함은 징비록의 뜻을 잊었음이라”. 서애의 탄식이 400년을 넘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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