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상징적 아이콘 카밀리아
벤더와의 만남과 깊은 인연인 듯

1924년부터 1930년까지 가브리엘 샤넬의 연인이었던 제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가브리엘 샤넬의 전설에 항상 등장할만큼 그녀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연인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한다.

프랑스 평민 출신의 가브리엘 샤넬이 영국의 귀족이며 최고의 갑부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을 어느 책에선 몬테카를로의 어느 파티에서 만났다고 하기도 하고,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패밀리히스토리보드에서는 플라잉 클라우드 요트 파티에서 만났다고 하기도 한다. 어디서든 영국 귀족 출신의 친구인 베라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됐다고 하는 기록은 동일하다.

가브리엘은 미인이며 스타일 좋은 베라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멋지게 차려 입혀 영국 귀부인들을 매장으로 끌어들이게 했는데, 이쯤 되면 가브리엘 샤넬의 마케팅 전략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제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2nd Duke of Westminster)의 이름은 휴 그로스베너(Hugh Gros venor)다. 벤더(Bendor)라는 애칭으로 불린 공작은 큰 키에 깔끔한 금발 머리를 가져 ‘우아하다’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 모든 것을 갖춘 영국신사였다.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1879년에 태어났고 그의 나이 네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할아버지인 휴 루퍼스(Hugh Lupus)가 그를 맡아 기르게 됐다. 후에 가브리엘 샤넬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게 될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그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자였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의 도시 36만 평을 소유하고 체셔 성과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해외 곳곳에 그의 소유의 땅과 성이 있었다고 한다. 벤더는 두 번의 결혼으로 두 딸과 후계자가 될 한 명의 아들을 뒀는데, 아들이 네 살에 맹장염으로 죽었다고 한다. 벤더는 아들의 죽음과 슬픔을 잊게 해줄 수 있는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다시는 이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결혼을 했던 여자들은 그에게 후계자를 낳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두 번째 결혼과 세 번째 결혼 사이에 가브리엘과 만났다.

가브리엘에 대해서 느꼈던 이끌림. 가브리엘을 위해서 내렸던 모든 선택. 가브리엘에게 느꼈던 욕구는 그 어느 여자를 만났을 때보다 강렬했다. 샤넬의 입장에선 이미 디자이너로 상당히 성공해있었던 때라서 영국 귀족과의 결혼은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드-몽드-샤를루의 책에 따르면 그녀는 임신을 위해 무진장 노력을 했지만 46살이 된 그녀에게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튼홀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공작 패밀리 히스토리보드를 보면 벤더의 여자들로 첫 번째 부인 그리고 두 번째 부인, 가브리엘 샤넬, 세번째 부인 등이 초상화나 사진으로 나와 있다. 샤넬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들은 가깝게 사귀었지만, 가브리엘이 공작부인이 되면 자신의 일을 포기할 수 없어서 결혼을 못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부자 귀족과 일 때문에 결혼을 못 했다는 것은 누가 보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튼홀을 가보면 누구라도 이 같은 생각에 공감할 것이다.

내가 이튼홀을 꼭 가보려고 한 것은 벤더와의 만남이 샤넬의 패션 세계와 디자인 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현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튼홀의 카밀리아 온실을 꼭 가보고 싶었다. 지금껏 샤넬의 상징적 아이콘이 된 카밀리아는 분명 벤더와의 사랑의 과정에서 그녀에게 영향을 준 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갔을 때는 한여름인 7월 31일이어서 꽃은 볼 수 없지만 가든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벤더의 입장에선 한겨울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꽃인 동백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샤넬의 전기를 쓴 많은 작가 중 아무도 샤넬의 카밀리아가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이튼홀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그녀의 아이콘이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을 읽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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