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두영 (주)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허두영 (주)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오후 6시가 되자 김 대리가 퇴근하는가 싶더니, 컴퓨터를 싸 들고 회사 근처 커피숍으로 이동한다. 고객에게 보낼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강제퇴근제 시행으로 사무실에 남아있을 수 없다. 이 부장은 하루에도 예닐곱 번은 전자담배를 피운다. 그의 업무시간은 그만큼 차감된다. 회사에서 10분 단위로 일하지 않는 시간을 업무시간에서 제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 대리와 이 부장은 갸웃하면서도 워라밸을 위한 회사의 방침이라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다. 올해 7월부터 법정근로시간이 주 52시간으로 단축되면서 생긴 변화들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낯설었지만, 이젠 제법 익숙하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Work & Life Balance’의 줄임말이다. 이 표현은 축약하고 부려 쓰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먼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워라밸은 젊은 구직자들이 회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취업포털의 조사를 보면, 직장인들이 회사 선택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은 워라밸(40.3%)이었다. 연봉(13.0%), 고용 안정성(12.5%), 적성에 맞는 직무(11.3%)보다 월등히 높았다.

세대별로 워라밸을 바라보는 태도도 다소 차이가 난다. 전통 세대(1940~54년생)와 베이비붐세대(1955~64년생)는 가족을 위해 일 하느라 삶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X세대(1965~ 1979)는 선배세대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밀레니엄 세대(1980~2000년생)는 일과 삶의 균형 내지는 삶에 방점을 둔다. 그래서일까? 밀레니얼 세대를 ‘워라밸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부정적인 시선이 숨어있다.

생각보다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해가 많다. 워라밸과 관련해 고민해 봐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다른 시각에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먼저, ‘왜 꼭 균형이라야 하는가?’이다.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부터가 의문이다.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일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워라밸은 꼭 지켜야 하는 것처럼 괜한 강박마저 들게 한다. 업무 특성상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직장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소외감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초과근무수당으로 임금을 보전하는 사람은 또 어떤 마음일까? 또 우려스러운 건 젊은 후배들이 각종 인위적인 제도의 덫에 걸려 일을 통해 전문성을 쌓는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오히려 개고생하며 배울 시간을 확보해야 할 시기 아닌가?

둘째,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게 능사일까?’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멕시코 다음으로 세계 2위다. 더 안타까운 건 노동생산성은 세계 28위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열심히 일은 하는데 그만큼 얻는 건 많지 않고 실속이 없다는 얘기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멍청하면서 부지런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일하는 시간을 줄일까’보다는 ‘어떻게 일의 효율과 생산성을 늘릴 것인가’로 마인드를 전환해야 한다. ‘얼마나 일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생산적으로 일하느냐’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하는 동안 얼마나 의식적으로 몰두하느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성과자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시간을 확보한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워라밸을 주도하는 게 맞을까?’이다. 정부는 근로기준법까지 개정하면서 300인 이상의 사업장부터 단계적으로 주 52시간제의 시행을 유도하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 패러다임에 갇힌 정책이 아닐까? 또 정책은 결과로 나타나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영향을 주는 독립변수여야 한다. 워라밸을 종속변수로 본다면 주 52시간제를 독립변수라고 할 수 있을까? 따뜻한 가슴으로 만들어진 정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책은 냉철한 이성이 전제돼야 한다. 정책의 실행을 돕는 각론 차원의 현실적인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들이 갈피를 못 잡고 눈치만 보며 우왕좌왕하지 않을 것이다.

일과 삶은 ‘균형’보다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예컨대 중요한 프로젝트를 할 때는 며칠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고, 여유가 생기면 몰아서 쉴 수도 있다. 지금은 산업화 시대처럼 천편일률적으로 공장이 가동될 때 열심히 일하고, 때 되면 기계를 멈추고 퇴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정보와 기술의 폐기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 이젠 새로운 상품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밤낮없이 두뇌를 풀 가동해야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시대다. 비즈니스별로 조직과 업무의 특성이 천양지차다. 조직과 개인이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자율적으로 일과 삶의 중심을 잡으면 되는 것 아닐까? 정부는 워라밸을 위한 정책도 좋지만, 삶의 질 개선을 위한 고용 창출 정책을 더 시급하게 챙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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