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준 산업경제팀장
송세준 산업경제팀장

○…“재벌개혁은 몰아치듯이, 때리듯이 하는 게 아니다. 지속가능하게, 그럼으로써 역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대등하고 자유로운 사적 거래가 전제되지 않고 있다.” “필요하다면 검찰 등 사정기관까지 공조해 재벌개혁을 이뤄내겠다.”

재벌개혁의 전도사로 평가받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9일 첫 기자간담회에서 쏟아낸 말 중 일부다. 그는 이날 재벌 개혁에 대해 구체적이고 강력한 ‘한방’을 꺼내진 않았다. 패를 다 보이진 않았지만 현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를 알리기엔 충분했다.

○…다시 재벌개혁이 정부 차원의 어젠다로 등장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재벌개혁의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다.

재벌개혁 논의를 유발시킨 최초의 사건은 1963년 ‘삼분 폭리사건’이다. 소수 대기업의 담합으로 전국에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 등 삼분(三粉)의 사재기 열풍이 일었다. 정경유착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은 컸지만 군사정권은 이를 서둘러 봉합했다.

10·26사태 열흘전인 1979년 10월 16일, 옛 전경련 회관 준공에 맞춰 박정희 전 대통령은 ‘創造 協同 繁榮’이라고 쓴 휘호를 선물했다. 지금도 여의도 전경련 사옥엔 기념석이 세워져있다.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박정희 시대 18년을 상징한다.

공정거래법이 도입되고 지금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5공화국 초기인 1981년이다. 1987년 개헌에는 ‘경제민주화’ 정신이 헌법에 담기기도 했다. 그러나 재벌권력은 점점 팽창했고 5년마다 바뀐 정치권력과의 유착도 더욱 노골화됐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벌개혁은 변곡점을 맞는다. 경제력 집중 억제와 지배구조 개선을 두 개 축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각종 정책이 추진됐지만 매번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참여정부의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파동이나 도입과 폐지를 반복한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대표적이다.

과거 숱한 재벌개혁이 좌초된 원인은 다양하다. 개혁 주체의 의지가 약하거나, 기득권층의 저항과 위협이 통한 적도 많다. ‘이러다 경제가 망할 수 있다’는 막연한 국민적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 것도 컸다. 경제활성화 또는 성장의 반대개념으로 읽혀질 때, 시비(是非)를 떠나 이를 뒤집을 논거도 부족했다.

○…정치적 개혁의 성공여부는 ‘홀씨(주도세력)’와 ‘텃밭(지지기반과 세력)’, 텃밭에 내려앉은 홀씨가 발아할 수 있는 적절한 ‘기온(시대적 분위기의 성숙)’에 달려있다는 게 정설이다.

홀씨는 개혁의지, 텃밭은 국민적 지지, 기온은 시대적 열망의 다른 이름이다. 셋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

현대사를 논외로 치더라도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실학파, 대원군, 개화파는 시대를 앞서나간 선각자들이었지만 그들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텃밭에 맞지 않는 홀씨를 파종해 발아되지 않거나 텃밭도 아닌 곳에 씨를 뿌려 씨앗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이도로 치면 최상급의 문제가 재벌개혁인데, 개혁에 대한 저항은 상수(常數)로 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을 고려할 때 현 정부는 적어도 홀씨와 기온의 관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를 맞았다. 그래서 관건은 역시 텃밭이 아닐까 싶다. 주도세력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전제에 오류가 없다면, 현 정부 재벌개혁의 성패를 쥔 열쇠는 이에 동의하는 국민적 지지의 깊이와 견고함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민심을 얻지 못한 개혁은 비록 정당할 수는 있어도, 역사가 말해주듯 한낱 꿈에 그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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