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내 기틀잡아 노조다운 노조 만들 것"

#세간에 잘 알려진 끓는 물속의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바로 뛰쳐나오지만 상온의 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무기력해진 개구리가 결국 끓는 물속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지난 2009년 설립 이후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도 마치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무기력했던 서울9호선운영주식회사의 직원들이 냄비를 뛰쳐나왔다. 지난 1월 노동조합을 설립하면서 근로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

“벼랑 끝에서 마지막으로 변화를 위해 움직인 겁니다.”

박기범 서울9호선운영노동조합 위원장은 최근 본지와 인터뷰를 통해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해달라는 요구에도 회사 측에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지난 1월 노조를 설립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제는 고해성사를 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지금의 문제를 말하고 바뀌지 않으면, 9호선은 노동자에게도 시민에게도 미래가 없는 조직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노조 측에 따르면 9호선은 현재 다른 철도 운영기관과 비교할 때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보이고 있다. 많게는 1시간까지 긴 운전시간과 1시간 정도밖에 보장받지 못하는 휴게 시간. 다른 운영기관들이 최소 2시간 30분 수준의 휴식을 보장하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4월 13일자 보도.

회사 측에서는 법에서 정한 휴식 시간을 보장하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이지만, 기관사 업무 특성을 고려했을 때 적절치 못하다는 게 박 위원장의 지적이다.

그는 근로환경을 개선해달라는 요구가 공허한 메아리가 돼 떠도는 일이 늘어나면서 직원들이 무기력해졌다고 설명했다. 좋은 근로조건을 위해 힘쓰는 것 보다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하는 일이 최선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9호선 기관사들의 이직률은 56%에 달한다. 직원들은 9호선을 ‘기관사의 무덤’으로, 철도 운영기관 사이에서는 9호선을 ‘기관사 양성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치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된 듯, 이 같은 일에 어느덧 길들여져 버렸다는 거다.

박 위원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9호선이 언제들 좋은 자리가 생기면 떠나야 할 직장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고,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남은 직원들은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9호선에 대해서는 직장이 아닌 아르바이트 정도의 애착밖에 남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남은 직원들이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는 것.

서울9호선운영주식회사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그는 “함께 입사한 직원들 중 남은 사람이 몇 명 없다”며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 회사를 욕하며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오히려 떠나지 못한 사람은 패배자로 남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부분 20대, 30대 초반인 기관사들도 지금은 젊을 때의 체력 하나만 믿고 버티고 있지만, 건강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 열악한 근무여건 속에서 고혈압과 시력저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직원이 늘고 있다. 언제라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입사 초기부터 경험을 쌓은 직원들은 떠나가고, 그 빈자리를 젊은 직원들이 채우고 있어요. 최근에는 산학협력 등을 통해 더 젊은 기관사들이 입사하고 있죠. 지금이야 열악한 근무환경도 젊은이의 체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직원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해마다 우리의 몸을 감가상각해가며 일하고 있다고 말해요. 사실상 직원들의 젊음을 팔아서 회사가 장사하는 셈이죠.”

그는 또 “아이러닉하게도 기관사들이 제 역할을 다해 9호선은 운행률 100%라는 훌륭한 실적을 내고 있다”며 “누가 봐도 완벽한 성적이지만 직원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만든 부끄러운 성적표라는 것을 회사가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은 사람이 즐거운 회사를 만드는 게 노조의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누구도 다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일을 한 것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받고 성과를 인정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9호선도 그런 회사가 돼야겠죠. 9호선을 직원들에게 ‘좋은 집’이 되도록 하고 싶어요. 배수의 진을 치고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상황에서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막 만들어진 노조에서 3년이라는 임기 동안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제가 있는 동안 노조의 기틀을 잡고, 노조다운 노조를 만드는 게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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