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적은 없지만 흡사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듯 그렇게 내리 달려버린 술자리. 어제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남은 건 숙취뿐이다.

쓰린 속을 달래려 라면을 주문해 본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浮薄)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 라면을 끓이며 이처럼 감칠맛 나는 글귀를 써낸 작가를 잠시 동경하며 해장라면 한 그릇을 받아든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이 허전한 기분은. 기름기 도는 붉은 국물에 유유히 떠다녀야하는 그것. 바로 달걀이 빠져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선조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라면의 부재료에 불과한 달걀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목구멍을 타고 훌훌 넘어가던 예전의 그 맛이 아닌 것만 같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산되면서 달라진 풍경과 마주하니 흔하디흔한 것도 없어지니 귀하다는 진리를 새삼 느낀다.

달걀은 단백질, 탄수화물, 철분과 칼슘, 비타민 A·B 등이 포함돼 있어 완전식품으로 각광받았다. 특히 가성비가 뛰어난 식재료다. 다양한 영양소가 들어있는데 가격까지 싸다보니 다양한 음식에 두루 쓰여 왔다. 그래선지 저마다 달걀이 등장하는 추억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을 법하다.

양철도시락 바닥에 달걀 프라이를 깔고 그 위에 밥을 덮어 친구에게 뺏길까봐 혼자만 열심히 먹었던 친구가 떠오른다. 동네 계모임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가 참석 인원수에 맞춰 달걀을 냄비 가득 넣고 삶으셨던 기억도 난다.

운동회나 소풍 등 학교 행사에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했고, 기차든 버스든 여행의 동반자였다. 소금을 콕 찍어 청량음료를 곁들이면 이만한 음식이 없다. 노른자는 뻑뻑하지만 수분을 머금고 있는 흰자가 있어 먹기 또한 어렵지 않다.

달걀이 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란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달걀의 가치는 돼지고기 한 근과 비슷했다. 당시 돼지고기 한 근(600g) 가격이 120원이었는데 달걀 10개 가격이 110원이었다고 하니 귀한 몸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선지 달걀은 귀한 선물 중 하나였다 한다. 60, 70년대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보면 학교 담임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선물로 짚으로 만든 꾸러미에 달걀을 선물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AI는 추억의 선물세트도 등장시켰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선물세트 판매대에 달걀이 자리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명절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식재료 중 하나인 달걀을 선물세트로 구성해 선물하도록 기획됐는데 꽤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개 들어있는 달걀 선물세트 가격은 약 1만원 선이다.

경품으로 달걀을 주는 기업이나 식당도 늘어나고 있다.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거나 음식 값이 나오면 계란을 주는 식이다.

달걀 품귀현상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수요에 따른 공급량을 확대하기 위해서 달걀 수입을 결정했다. 미국과 호주로부터 수입한 달걀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신선도가 생명이니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 미국산 달걀 1차 수입분은 160만개로 무게는 100톤에 달한다.

항공료는 톤당 150만원으로 수송 비용이 1억5000만원에 달한다.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고 달걀을 먹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이 훗날 시대상을 담은 또 다른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다가오는 설 명절,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분들에게 귀하디 귀한 달걀을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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