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요 클래식 공연 기획사 A팀장은 골머리를 않고 있다. 내년 굵직한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라인업을 구상하고 있는데 후원 기업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악단의 월드 투어 스케줄이 일찌감치 정해지는 만큼 내한 계획 역시 다 세워놓았는데, 예전만큼 기업 후원 문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 전화하는 곳마다 “김영란법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리기만해 일손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2. 대형 뮤지컬 제작사 B 이사는 요즘 다른 제작사 관계자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늘었다. 김영란법 관련해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서다. 하지만 쉽사리 대응방안을 내놓는 곳이 없다. 친한 기자들에게 물었지만 그들 역시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C 기자는 요즘 주말마다 바쁘다.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 공연을 몰아 보러 다니고 있다며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3. 가요기획사 D 팀장은 아이돌 멤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이제 잦은 결석은 봐주기 힘들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국내외 콘서트 때문에 결석한다는 요청을 학교 측에 하면 청탁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해외 투어가 빈번한 상황이라 뾰족한 수를 찾기 힘들다.

#4. 영화 관계자 E 씨는 기자들 만나는 횟수가 부쩍 줄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늦게까지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것이 다반사였으나 김영란법 첫 적발 사례가 되지 말자며 영화 제작사나 기자나 만남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저녁이 있는 삶’이 됐지만 마음 속에 꺼림칙한 것이 남았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알려야 하는데 전화로, SNS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28일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첫 날, 노심초사하던 공연 연예계가 당일부터 혼란을 겪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티켓 값이 선물 상한액인 5만원을 넘어서는 뮤지컬, 클래식음악 공연 제작사 관계자들이 애면글면하고 있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명시되지 않은 탓이다. 국민권익위원회의 해석 또한 사례별로 다른 유권 해석이라, 선례가 나오지 않는 이상 가늠할 수도 없다. 법률 자문 등을 받는 등 대책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나 아직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는 이유다.

◇뮤지컬·클래식업계 전전긍긍…대형 공연축제도 분위기 축소

문화 접대를 위해 티켓을 대량 구매한 기업들의 활동 위축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대형 뮤지컬 전체 객석에 대한 기업 구매량은 20%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미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앞선 몇몇 공연의 티켓에 대한 기업 구매량이 줄었다고 제작사들은 전했다. 연말에 예정된 뮤지컬에 대한 기업에 대한 관심도 예년에 비해 덜하다.

연말 공연을 올릴 예정인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기업들이 문의가 눈에 띄게 줄었다"며 "요청을 해도 김영란법 이야기를 우선 꺼내며 몸을 사리고 있다”고 전했다.

마니아 층 등 개별 고객이 많은 뮤지컬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일반 관객이 적은 오페라를 비롯한 클래식음악 업계는 큰 타격을 입을까 걱정이 산더미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클래식음악계는 유료 관객의 절반가량을 기업 협찬 등에 의존하고 있다. 오페라 제작사 관계자는 “기업이 티켓 구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제작비를 충당해가는데 상당한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10월6일 개막하는 ‘제14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풍경도 싹 바뀌었다. 주관 기관인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단체 기관장을 물론 언론사 관계자 등에게 전하던 무료 초청장을 없앴다.

앞서 오는 29일 개막하는 ‘2016 전주세계소리축제’ 역시 관행적으로 발행하던 무료 티켓대상자를 대폭 축소했다. VIP와 게스트를 상대로 발행하던 ID카드를 취소하고, 언론사 관계자에게 취재카드를 발급하되 축제기간 동안 공연 티켓 가격을 합계 5만원 이하로 제한했다.

◇연예계도 눈과 귀 쫑긋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예의주시하는 모양새다. 특히 가요콘서트 시장 때문이다. 팬층이 확고해 개별 구매자가 많아, 뮤지컬이나 클래식업계보다는 위기감이 덜하다.

하지만 그동안 관행으로 통하던 관계자들을 초대하는 것이 김영란법에 어긋날까, 위축되는 분위기다. 가을 콘서트를 여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그간 도움을 준 분들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멤버 대부분이 대학생 또는 고등학생인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도 여파가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멤버들은 생각보다 큰 번거로움을 겪을지 모른다. 콘서트 준비와 해외 투어 등을 이유로 학교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이 많았으나 이날부터는 학교생활에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학부모 등이 학교에 등하교 문제로 부탁을 해도 부정 청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계 역시 여파가 미치고 있다.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프레스 티켓을 대폭 줄인 영화계는 10월6일 개막하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해를 살 만한 행사 역시 대폭 축소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법”…허약한 시장, 체질 개선의 기회

기획사, 기업, 언론계 종사자 모두 김영란법 첫 적발 사례가 되지 않기 위해 사전에 오해의 소지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김영란법 위반 사례를 고발해 포상금을 챙기는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가 벌써부터 공연기획사를 상대로 위반 여부를 묻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공연계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추가로 티켓을 요구하는 건 당연히 부당하지만, 순수 취재를 위한 공연 관람조차 제한하는 건 과분한 처사라는 것이다.

기자가 취재 목적으로 기획사로부터 지원 받는 티켓 가격은 역시 5만원이하로 제한되는데 최저티켓 가격이 이 값을 넘는 대형 뮤지컬, 오페라, 클래식음악은 수두룩하다. 이에 따라 일부 공연장은 4만원짜리 티켓 좌석을 만드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기업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사회공헌 차원에서 공연 티켓 등을 대량 구매하고 있지만, 이 티켓 자체가 자칫 유관 기관 등에 흘러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해석으로 어느 선까지 법에 저촉되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불안감음 더 크다.

결국 위반 사례 등이 나와야 가늠할 수밖에 없어 기획사, 기업, 언론사 등 모두 눈치싸움을 하는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공짜표 남발과 부정 청탁 등을 막는 긍정적인 부분을 보고 있다. 특히 기업 내 문화 회식, 공연 제작사 등과 관련이 없는 선에서 개별로 진행하는 저렴한 문화 접대가 늘 거라는 기대다.

문화 회식은 하지만 사실상 빈도에 한계가 있고, 저렴한 공연의 문화 접대 역시 수요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무리한 낙관이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2013년 국세청에 신고된 기업의 접대비 지출 금액은 9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문화접대비 신고금액은 고작 45억원에 불과했다. 비중으로 따지면 0.05%. 이후에도 크게 늘지 않았다.

2007년 건전한 접대문화 조성, 문화예술 진흥 지원 등을 위해 도입한 문화접대비 제도가 유명무실했던 셈이다. 대형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문화 접대에 한해서, 선물 상한액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공연계 우려는 허약한 문화 시장에 때문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크다. 공연계 침체로 티켓 판매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또 다른 위기감이라는 것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단체 티켓 판매가 끊겨서 기획사가 흔들린다는 건 개별 구매의 비중이 낮다는 걸 반증한다”며 “공연 시장이 건강하지 않은데 기업 단체 판매로 그때그때 수혈해가며 겨우 버텨온 사실이 새삼 드러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참에 기획사, 기업, 언론사가 건전한 공연 시장 문화를 조성했으면 한다”며 “한차례 홍역을 앓고 체질 개선 뒤 시장을 안정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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